‘소유 교회’ 아닌 ‘하나님 교회’로 변화 필요
‘핍박 극복 → 첫 사랑 극복’해야 교회 살 수 있어
‘1907년 일어난 회개운동’ 한국 교회 역사적 사건
소망교회는 당회의 오랜 갈등과 분란 속에도 교인 수가 계속 늘어났다. 고소‧고발과 유인물 배포로 이어진 소망교회 분쟁은 매스컴을 통해 사회 전반에 알려졌다. 그럼에도 교인 수가 계속 늘어났다는 점은 선뜻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한국 교회 전체의 위기가 심각하다 보니 많은 중소형 교회 성도들이 초대형 교회로 수평 이동하고 있는 현상을 먼저 알아야 이를 이해할 수 있다. 교회 양극화 현상이 극심해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단순히 초대형 교회가 화려하고 편리해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중소 교회에서 갈등으로 상처받은 평신도들 입장에서는 큰 교회 뒷자리에서 예배드리는 것이 마음 편하다. 그런 이유 등으로 초대형 교회들은 작은 상가 교회들의 블랙홀이 되기도 하면서 상처받은 이들의 피난처, 도피처가 되기도 한다. 이같은 ‘양극화’ 현상은 비판하고 또 걱정해야 할 일이지만 그렇다고 초대형 교회들이 무너지기를 바랄 일도 아니다.
그 첫 번째 이유는, 작은 교회에서 상처를 받고 옮겨온 성도들이 초대형 교회에 옮겨와서까지 심한 갈등을 목격하면 그대로 ‘길 잃은 양’이 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단 한 명의 영혼이라도 잃어서는 안된다는 데 교회는 무거운 책임을 느껴야 한다.
그 다음 두 번째 이유는, 한국 교회가 여전히 롤모델을 필요로 한다는 점이다. 과거 한국 교회에서는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 전에 “영락교회는, 충현교회는 어떻게 했지?”라고 묻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직접 찾아가서 자료도 얻고 질문도 하고 서로 배우며 교회의 운영 방향을 잡아갔다. 당시의 앞선 교회들은 자원과 인력을 활용해서 서구권 선진 교회들의 발전된 교재와 시스템을 들여왔고, 한국 교회 전체에 전파했다. 그런 선한 영향력이 있었기에 한국 교회가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부정적인 성장도 있었다. 1970년대 후반, 많은 교회들이 너무 쉽게 대형화, 초대형화 되면서 ‘개교회주의’가 확산됐다. 이런 과정에서 한국 교회들은 외형주의, 물량주의, 그리고 제왕적이고 권력 지향적인 목회 문화를 성공 모델로 착각했다. 개교회주의는 ‘내 소유 교회주의’로 오염되면서 부패해갔고 저질 정치문화가 교회를 오염시켰다. 교회들은 점점 수직구조화되어 가고 독선적 권력이 지배하게 됐다.
이제는 철저한 반성과 회개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 한국 교회의 위기가 극복될 것이다. 그러기에 지금은 ‘교회를 향한 찬바람’, 즉 핍박이 필요한 때이기도 하다. 핍박을 극복하면서 처음 사랑을 극복해야 교회가 살 수 있기에 그렇다.
그렇다고 세대교체 과정의 갈등을 극복할 책임을 2대 목사에게 오롯이 지우는 것도 옳지 않다. 교회는 목사 개인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새로 부임해온 목사보다는 처음부터 함께해 온 제직들, 특히 장로들이 갈등의 본질을 더 잘 알 것이므로 책임도 크다.
좋은 교회의 역할 모델은 여전히 필요하다. 선망의 대상이었고 긍정적인 평가를 받던 교회들마저 세대교체 과정에서 산산이 부서지는 것은 마치 예루살렘 성이 무너진 것처럼 한국 교회의 성곽이 무너지는 것과 같다. 한국의 초대형 교회는 130년 한국 교회의 역사 속에 하나님이 만드신 특별한 작품이다. 앞으로는 이런 작품이 다시 한국 교회에 나오기 힘들 것이다. 한국에 주신 하나님의 최우수 작품이 손상되면 안 된다.
극복의 길은 단순하다. ‘내 소유 교회주의’에서 벗어나 철저하게 ‘하나님 교회’로 섬기는 모델을 만들면 된다. 그렇게 본질로 돌아간다면 어떤 갈등이나 분쟁도 결국은 극복된다. 이를 위해 온 성도는, 특히 장로들은 목숨을 걸 각오를 하고 노력해야 한다.
준비된 옥토 위에 피어난 한국 교회
교회 갈등의 원인이 되는 기업형 ‘내 소유 교회주의’는 내가 잘해서 교회가 성장했다는 생각에서 비롯된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한국 교회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1907년에 일어난 회개운동이다. 신앙인들의 삶과 국가의 처지가 모두 다 벼랑에 떨어진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서 하나님 앞에 무릎 꿇는 회개운동이 사직된 것이다. 500년 조선왕조가 무너진 절망과 폐허에서도 지도층이나 권력자들만을 비판하지 않고 “제가 죄인입니다”라며 무릎 꿇는 운동이 시작됐다는 것이 감동적이다.
그 계기는 길선주 목사가 친구의 재산을 정리하면서 미화 100달러 상당의 돈을 횡령했다는 것을 강단에서 고백하고 회개한 일이었다고 한다. 이 고백의 울림에 따라 너도나도 자기 죄를 자복하며 하나님께 온전히 무릎을 꿇었고 한국 교회 전체에 회개운동으로 퍼져나갔던 것이다.
이 사건은 그때까지 서양 선교사들에 의해 이끌리고 성장했던 한국 교회가 그들에게서 젖을 떼고 비로소 독립적인 성장을 시작하는 전환점이 됐다. 한국의 교회 지도자들에게 독립적으로 교단과 교회를 지도할 능력이 생겼다. 하나님께서 이들을 직접 들어 쓰시기 시작한 것이었다.
1907년은 노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군 2개 여단이 우리나라에 주둔하면서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시킨 해였다. 해산된 군인들이 저항운동을 하자 일본 헌병들은 무고한 교회 전도사들을 잡아다 재판도 없이 총살했다. 겨우 젖을 뗀 한국 교회는 이 같은 핍박 속에서 오히려 신앙이 더욱 깊이 뿌리내렸다. 1911년에는 신구약 성경 한글 번역이 완성됐고, 일제의 식민지 압박 속에서도 1912년 한국 장로교단 창립총회가 열렸다.
일제 35년간의 박해를 견뎌내면서 뿌리를 내리고 싹을 피웠던 한국 기독교는 1945년 광복으로 봄을 맞으면서 왕성한 잎을 피워내기 시작했다. 또한 지주와 소작농이 없어지는 농지개혁을 통해 혁명적 농업 민주화가 이뤄졌다.
박래창 장로
<소망교회 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