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새로운 사역 위한 희망의 전주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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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바닥에 놔둔 물컵을 모르고 내가 발로 차서 엎지르거나 책상 위에 물건을 놓아둔 것을 모르고 지나다가 부딪치면 그때서야 앞을 못 보는 시각장애자인 것을 느끼곤 한다. 사랑하는 아내와 딸들이 지금까지 나를 정상인처럼 여기며 자랑스럽게 대해 주는 것이 참으로 고맙다.

나는 지금까지 뜻 있는 성도들과 교회에서 조금씩 모아 보내는 현금으로 선교하다 보니 혹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거나 돕는 교회와 단체들에게 미안하고 또 오해할까 싶어 가족들과 함께 즐기는 시간을 갖지 못했다. 가족과 함께 강이나 산, 넓은 들판에 나가서 자연을 즐기거나 멋진 식당에 가서 온 가족이 어울려 맛있는 식사를 하는 것은 남의 일로 여기며 살아왔다. 그저 도와주는 분들께 보답하는 길은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앞뒤도 보지 않고 열심히 일해 왔다. 나의 딸들이 결혼해 가정을 이룰 때 그들이 베푸는 만찬을 나는 기대하고 있다.

가정을 이룬 지 일년 반이 지났을 무렵, 나는 미국 유학 계획이 어긋났기 때문에 마음을 잡지 못하고 방황하면서 하루하루 보내고 있었다. 당장 가장으로서 생활을 꾸려 나갈 문제가 심각했다. 나의 아내는 시각장애인 어린이들이 수용된 임마누엘 여시각장애원에서 총무로 봉사했고, 나는 개척 교회에 나가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그들을 만나는 기쁨으로 지냈다. 교회에서는 한 달에 5천 원의 사례비를 정했으나, 가난한 개척 교회이기에 받지 못했다. 집에는 장인·장모님이 함께 계셨기에 생활이 더욱 힘들었다. 하는 수 없이 나의 아내는 어느 분의 소개로 영등포 어느 공단 기숙사 사감으로 가게 되었다. 그때 나는 빵 한 조각으로 끼니를 이어가며 임마누엘 여시각장애원 교실 한구석 의자 위에서 잤다. 토요일과 주일이 제일 기다려지는 날이었다. 왜냐하면 교회 학생들과 함께 어울리다 보면 근심 걱정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동안 지내던 중 나를 어렸을 때부터 잘 알고, 점자까지 가르쳐 주셨던 그곳 책임자 H 선생님께서 내가 교실에서 자는 것이 안 좋아 보였는지 교실 문을 자물쇠로 굳게 잠그셨다. 무덥던 어느 여름날 외출했다가 돌아와 보니 교실 문이 굳게 잠겨 있었다. 참으로 황당했다.

그 날은 여시각장애원 운동장에 있는 작은 벤치에서 밤을 보냈다. 그 당시에는 통행금지가 있던 때라 주변은 정적이 가득하고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깊은 밤 홀로 앉아 기도하며, 이 생각 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새벽 4시가 되어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4시 30분이 되니 교회에서 새벽예배를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왔다. 밖에서 밤을 꼬박 새웠기에 내 몸에서는 땀내가 나고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나는 누가 볼까봐 이 구석 저 구석으로 피해 다니다가 세수하고 여시각장애원 강당 피아노 뒤에 숨었다가 밖으로 나갔다.

여시각장애원 가까이에 있는 제과점에 가서 우유 한 잔과 빵 하나를 시켜 아침식사로 먹고 있는데, 어느 목사님이 교인들과 함께 그 제과점으로 들어왔다. 나는 그 목사님과 인사하고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런데 그 목사님은 자신이 시무하시는 교회에 와서 주일학교, 중고등부를 맡아 달라고 하면서 사례비는 6천 원을 주겠다고 하셨다. 그 당시에 아내는 기숙사 사감으로 한 달에 2만 원을 받고 있었다. 

교회에 오는 조건은 교회 가까이 이사를 오고, 사모가 반드시 함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내가 기숙사 사감으로 간지 4개월이 되었을 때였다. 나는 아내에게 전화해 모 교회에서 청빙받은 이야기를 하면서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의논했다. 아내는 사감을 그만두고 오겠다고 했다. 그로부터 한 달 뒤 교회 가까이 방을 구해 이사를 했다.

나는 그 교회의 전도사로 부임했다. 그 교회에 있으면서 목사고시를 치렀다. 새벽예배를 비롯해 심방 등 교회 전반적인 행정을 맡아서 했다. 내가 성심성의껏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자 주일학교 어린이부터 청년부, 교인들까지 나를 따랐다. 그러자 목사님께서 질투가 나셨던지 나를 대하는 눈길이 그다지 곱지 않았다. ‘괴로운 인생길 가는 몸이 평안히 쉬일 곳 아주 없네’ 라는 찬송(290장)이 꼭 그때 내 심정을 노래한 것 같았다. 나는 이곳도 내가 있을 곳이 아니구나 싶어 교육강도사직을 사임하고 다른 교회로 부임했다.

옮겨간 교회에서도 주일학교와 중고등부를 맡게 되었는데 전에 있던 교회에서와 같은 일이 또 생겼다. 나는 이 교회도 내가 있을 곳은 아니구나 싶어 모든 것을 털어 버리고 친구와 함께 시각장애인을 위한 교회를 세우기로 결심했다. 수중에 한푼도 없이 시작한 시각장애인연합교회는 현재 교인 400명이 모이는 교회로 성장했다.

이 일을 통해 절망 너머에 희망이 있고 길이 있다는 진리를 찾게 되었다. 우리는 지금 경제 위기로 인해 어려운 시기를 살고 있지만 낙심치 말고 믿음의 우물을 파면 틀림없이 샘물이 나올 것이다.

김선태 목사

<실로암안과병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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