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은 공평하다. 누구도 피할 수 없다. 고대인들은 죽음 이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무엇을 믿었을까? 대부분의 고대인들은 막연하지만 죽음 이후의 삶을 믿었다. 그런데 2천여 년 전에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에서 부활하신 것이다. 누구에게도 일어나지 않았던 일이,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 만에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오셨다. 남매 마르다와 마리아가 슬퍼하고 있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예수님은 생명의 주관자이심을 선포하셨다. 마르다가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예수님께 고백했다.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믿나이다.” 예수님께서 ‘부활’은 모든 의인들이 부활하게 될 미래에 완성되는 사건으로 말씀하셨다.
웨스트 민스터 신앙고백이다. “사람이 죽으면 그 몸은 티끌로 돌아가서 썩지만 그 영혼은 죽거나 자지 않고 영원히 살아있기 때문에 본래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간다. 그때에 의인들의 영혼은 완전히 성화(聖化)되어 가장 높은 하늘에 영접되며 빛과 영광 가운데 계신 하나님의 얼굴을 뵈며 몸이 완전히 구속될 것을 기다린다. 악인들의 영혼은 지옥에 던져져서 고통과 전적(全的)인 암흑 속에 머무르며 저 큰 날에 받을 심판을 기다린다.” 몸을 떠난 영혼이 이외의 다른 곳으로 간다는 것은 성경은 인정하지 않는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죽임을 당할 것이고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이 바라고 예상했던 것은 예수님은 이스라엘 땅에 ‘하나님 나라를 임하게 하시는 분’으로 기대했다. 로마에서 해방을 해 주실 것으로 기대했다. 한편으로는 메시아일지도 모른다고 서서히 믿기 시작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교도(異敎徒)인 로마 제국의 세력에 의해 죽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십자가에서 죽으심은 모든 소망의 끝으로 생각되었다. 그 누구도 사흘 후에 부활하신 모습으로 자기들 앞에 다시 서 계시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부활(Easter)은 기독교의 핵심 교리이다. 부활절은 최대의 축일(祝日)이다. 유럽과 미국은 휴가를 얻고 학교는 쉰다. 부활절의 계란(Easter egg)은 새 생명과 중생(重生)을 상징한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미래가 두 단계로 일어난다는 신앙을 갖고 있었다. 첫째는 죽음과 그 직후의 상태로 머무는 단계, 두 번째는 새롭게 재창조된 세상에서 새로운 육체를 가지고 사는 단계이다. 예수님께서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말씀하셨을 때의 낙원은 하나님의 백성이 부활 이전에 안식(安息)하는 행복한 동산이다. 사도 바울이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고 말했을 때 죽음 직후에 주님과 함께 하는 지극히 행복한 부활의 서막(序幕)이다.
사도 바울과 요한의 신학은 부활 신앙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 부활을 빼버리면 신약 성경 전체가 의미를 잃게 된다. 부활한 새로운 육체란 시간과 공간을 차지하는 물리적인 존재인 것은 확실하지만 변형된 신령(神靈)한 육체, 새로운 속성(屬性)을 가진 몸이 될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물리적인 몸으로 공간에 계셨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 몸의 육체이셨다. 그 무덤은 비어 있었다. 잠긴 문도 통과해 다니셨다. 부활하신 지 40일 후에 하나님 나라 ‘천국’으로 가셨다. 복음서는 그 분이 메시아, 진정한 주님이심을 선포한다. 그 분은 부활하셨다고 증언한다. 우리는 주님을 믿는 자들이다. 따르는 자들이다.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이 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전령사(傳令使)가 되어 그 분이 주(主)되심을 세상에 공표하고 그 분, 주님의 나라가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임하게 해야 한다.
김용관 장로
<광주신안교회·한국장로문인협회 자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