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서 벗어나 김관근 목사 인도로 개종
평양신학교 졸업 후 정주읍교회서 목회
관서면 서당 시절 김이련, 김관근 부자로부터 처음 복음을 접했을 때만 해도 김병조는 삼강오륜(三綱五倫)의 유교가 월등한 종교임을 내세워 배척했다. 그 후 방현면으로 옮긴 뒤에도 김관근 부자의 전도는 계속되었다.
김병조에게 복음을 전한 김관근은 한국인 최초 세례교인인 백홍준의 사위로 언더우드에게 세례를 받았다. 독립협회 평안도 지부장을 지냈으며, 1910년 평양신학교 제3회로 졸업한 당대 개신교 지도자로, 선천의 양전백도 김관근의 전도로 기독교인이 되었다. 김병조는 김관근에게서 기독교 신앙과 민족의식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1907년 새해, 방현면 남시(南市)에 대화재가 발생해 80여 채의 초가가 전소되고 많은 이재민이 발생하는 사건이 있었다. 마을 주민들은 이방 종교가 들어와 토착 귀신이 노해서 벌을 받은 것이라고 일대 소요를 일으켰다. 남시 대화재 소문이 평북 대리회에 전해지자 대리회는 산하 교회들로 구호 연금을 거두어 마을 복구에 나섰다. 이 일로 마을 사람들의 원망은 사라졌으며, 김병조의 마음도 움직였다.
유교에는 없는 만민평등, 박애주의가 기독교에 있음을 알게 되면서 김관근의 전도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네가 예수를 믿고 지도자가 된다면 그동안 배운 지식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기독교는 지금 파죽지세로 퍼져나가 관서지방 곳곳에 교회가 세워지고 있단 말이야. 일단 남시교회(南市敎會)에 나가봐 믿음이 생겨날 거야.”
구성군 내 기독교 계통 사립학교들이 연이어 세워지고 방현면을 지나는 기차 소리와 함께 밀려오는 일본 군국주의의 위협에 김병조에게는 새로운 시대정신이 절실했다. 1909년 마침내 김병조는 32년 동안 신봉해 온 유교에서 벗어나 1909년 9월 김관근(金灌根) 목사의 인도로 개종했다. 마음이 서자 믿음을 향한 갈증은 그를 기독교 진리의 세계로 깊이 파고들게 했다.
남시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한 김병조는 2년 후인 1911년 1월 22일 같은 곳에서 라부열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아 정식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는 애국자를 키우기 위해 교육을 했다. 그런데 이제는 애국에 예수를 우선으로 교육하며 신앙을 갖고 민족 계몽을 시작했다.
일제는 1911년 애국계몽단체인 신민회를 ‘데라우치 총독 암살사건’으로 엮어 평안도와 황해도 중심의 많은 기독교 인물들을 투옥했다.
이 사건으로 큰 해를 입은 지역은 평북 선천으로 46명이 기소되었고, 정주는 34명으로 그다음이었다. 이 가운데 이승훈, 이명룡, 양전백, 선우혁 등은 3·1 독립운동에도 참여한 민족인사들이었다.
기독교인이 되었으나 여전히 한문 교사였던 김병조는 1913년 2월 19일에는 선천 남교회에서 열린 제3회 평북노회 추천으로 평양신학교에 입학해서 열심히 공부하면서 민족문제에 눈뜨게 되었다. 동시에 관리교회 조사로 목회를 시작해 1914년에는 그 교회에서 장로가 되었다. 1917년 평양신학교를 제10회로 졸업하고, 평북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후 관리교회를 시무했다.
1년 한 학기제인 신학교 학제에서 학업과 목회를 겸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김병조도 5년 만인 1917년 6월 제10회로 평양신학교를 졸업했다. 졸업 후 1918년 8월 19일 정주읍교회에서 열린 제14회 평북노회에서 김병조는 안승원, 조상섭, 송문정과 함께 관리교회 전임목사로 임명되어 목회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승하 목사<해방교회 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