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종교가 믿음을 강조하지만 특히 기독교 신앙은 믿음으로 출발하고 성장한다. 성경 안에 믿음이라는 단어가 580여 회 이상 언급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 3:15~16)
성경은 바른 신앙과 삶을 명시하고 구원에 이르는 길을 밝힌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 떠난 신학이나 신앙은 성립될 수 없고 성립돼도 안된다.
그리스도인들이 확립해야 할 신앙과 소망은 바로 부활신앙이다.
석가의 유해는 인도, 스리랑카, 미얀마, 태국, 네팔 등 불교국가에 사리로 흩어져 보관돼 있고, 마호메드의 무덤은 사우디아라비아 메디나 모스크 안에, 공자의 무덤은 중국 산동성 취푸시에 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무덤은 그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유는 부활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급조되거나 날조된 사건이 아니고 예수님의 예언의 성취였다. “제 삼일에 살아나실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마 16:21),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마 17:23), “사흘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가르치시니”(막 8:31),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 2:19).
예수님 자신이 사흘만에 부활하실 것을 밝히셨다. 그럼에도 예수님의 부활을 신화로 취급하는 신학자도 있고, 가사설, 기절설, 유기설, 환상설 등으로 왜곡하고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부활신앙이 무너지면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전인적으로 무너진다.
도마는 부활을 불신하는 제자 대표였다. “그의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요 20:25). 다른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시간 그는 다른 곳에 있었고(요 20:24), 우리가 주를 보았다는 다른 제자들의 전언을 불신하고 있었다. 함께 있지 않았다는 도마의 행방을 비약시킬 필요는 없겠지만, 부활 불신의 원인을 제공한 것은 분명하다.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보아야 믿겠다는 것은 과학적 접근법일 수 있다. 신앙과 과학이 대립하거나 충돌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러나 과학은 사실확인과 검증이 전제되는 것이고 신앙은 믿음이 확인이나 검증에 우선한다. 다시 말하면 과학은 알고나서 믿는 세계이고, 신앙은 믿고나서 아는 세계이다.
8일 후 드디어 도마도 함께 한 자리에 부활하신 주님이 찾아오셨고 도마에게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 20:27)고 하셨을 때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는 위대한 신앙을 고백했다. 그 고백 뒤에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라고 답하셨다.(요 20:29)
아무도 예수님의 못자국이나 창자국을 만진 사람은 없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바른 그리스도인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의 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셨다는 것을 확신해야 한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이 신앙이 흔들리면 구원도 영생도 무위로 끝나지만 부활신앙이 확립되면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천국을 바라는 소망 때문에 죽음도 순교도 겁날 게 없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부활을 선포하고 증언해야 한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박종순 목사
<증경총회장, 충신교회 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