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 전라도가 고향이지요 (43)

Google+ LinkedIn Katalk +

3.1운동, 광주 장터에 울려 퍼진 독립만세

특별히 3.1운동에 참가할 인원 동원을 분담하게 되었는데 서정희는 일반 시민, 홍승애는 수피아여학교 학생, 김강은 교인, 최병준은 숭일학교 학생, 기타 김태열, 최영균, 김용규는 시내 각급학교 학생들의 동원을 맡았다. 독립선언서와 태극기 준비는 최한영이 맡았으며 자금 준비는 이기호가 담당했다.

각각 책임을 맡은 책임자들은 목숨을 걸고 이 일에 뛰어들었으며, 특별히 수피아여학교 여학생들은 구약성서의 에스더처럼 “죽으면 죽으리이다”라는 각오로 밤새껏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운반하는 데 한몫을 했다.

드디어 작은 장터에 모인 1천여 명의 군중들은 손에 손에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들고 있었다. 이때 김복현이 독립선언서의 취지를 설명하는 연설을 한 후 독립만세를 제창하면서 선두에 서자 수피아 여학생들을 비롯한 많은 시민과 학생들은 만세를 부르면서 시가행진을 했다. 그 중 17세의 수피아여학교 학생 김양순은 총검을 들이대는 일본 헌병에게 용감하게 대항했다.

“쏠 테면 쏘아라.”

당당하게 외치는 수피아여학교 학생의 목소리에 놀란 헌병은 얼마 동안 넋을 잃고 있었다. 독립만세를 부르는 학생들과 시민들의 행렬은 시내로 돌입했고 만세 소리는 광주시를 뒤덮었으며, 멀리는 무등산까지 그 소리가 울려 퍼질 정도였다면 얼마나 큰 운동이었는가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이렇게 수피아여학교에서 적극 참여한 결과 아무 힘도 없는 교사 박애순, 진신애, 홍승애에게는 징역 2년형이 언도되었으며, 학생 20명도 옥고를 치렀다.

한때 수피아여학교는 3.1운동의 후유증으로 침체되는 듯했지만 이미 성경 시간과 채플을 통해서 고난을 극복할 수 있도록 훈련을 받았던 신앙인의 공동체였기에 다시 교실로 모여들었고 이들은 이 고난을 자랑하면서 새로운 각오로 출발했다.

이 일이 있은 지 얼마 안 된 수피아여학교에서는 해마다 이성은 교사가 만든 ‘열세 집 가극’을 통해서 민족운동의 사상을 심어 주었다. ‘열세 집’이란 말은 당시 조선이 열세 도였기에 열세 집이라 했다.

수피아여학교 학생들은 방과 후에 학교에 남아서 열심히 연극연습을 했다.

우리의 웃음은 따뜻한 봄바람처럼/ 훈풍을 만난 무궁화 동산/ 잘 살아라 삼천리 무궁화 동산/ 잘 살아라 이천만의 고려족/ 북편에는 백두산과 두만강으로/ 남편에는 제주도 한라산/ 동편에는 강원도와 울릉도/ 서편에는 조선의 아름다움을/ 맹호로 표시하니 십삼도라.

민족을 한 공동체로 알았던 수피아여학교 학생들은 각고 끝에 연습을 마쳤다. 드디어 공연의 날이 왔다. 언제나 광주의 기독교문화 행사는 오원기념각에서 진행되었다. 이미 학생들의 초청을 받은 관객들은 위층 아래층 할 것 없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공연 후 모든 관중들은 박수와 함께 한없이 눈물을 흘리면서 질서 정연하게 오원기념각을 빠져나갔으며, 수피아여학교 학생들은 기숙사에 모여 밤이 깊어 가는 것도 잊은 채 나라를 찾아야 한다는 뜨거운 열정으로 광주를 더욱 빛내기 위해 애썼다.

감옥에 갇혔던 교사와 학생들이 다시 학교로 돌아오게 되고 광주 YMCA 창립기성회 총무 김필례가 수피아여학교 교사로 부임하자 학교는 더욱 알차게 발전해 가기 시작했다.

광주학생운동과 수피아여학교

광주학생운동의 발단은, 1929년 10월 30일 광주와 나주 간의 통학열차 안에서 일본인 학생이 한국인 여학생을 희롱한 데서 비롯되었는데 이로 인해 나주에서 통학하던 양국 학생들 사이에 약간의 몸싸움이 있었다.

다음날인 10월 31일 오후 5시. 다시 양국 통학생들이 열차 안에서 몸싸움을 벌였고, 이 싸움으로 일본인 학교인 광주중학교의 한국인과 일본인 사이에 감정이 극도로 악화되었다. 광주중학교와 한국인만 다니는 광주고등보통학교의 교장과 교사들은 기차 통학생들에 대해 특별히 감독했다.

1929년 11월 3일은 일본인들에게는 4대 명절 중 하나인 메이지천황의 절기였으며, 일제가 자신들의 식민지 경제 수탈의 한 성과를 자축하기로 한 ‘전남산 쌀 6백만 석 돌파 축하회’가 있는 날이기도 했다. 메이지날을 맞이해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을 비롯해서 광주농업학교 학생들,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들, 수피아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은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일전에 나주 통학생들과의 몸싸움 사건에 대해 일본인 남학생에게 유리하게 기사를 쓴 ‘광주일보사’를 습격해 보도 내용에 대해 항의함과 동시에 윤전기에 모래를 뿌렸다.

또한 오전 11시경 신사참배를 마치고 돌아오는 일본인 기차 통학생들을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집단 구타하면서 삽시간 광주 시내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때 도망가는 일본인 학생들을 광주역까지 추격해 개찰구 안까지 들어가 구타하기도 했다. 힘에 밀린 일본인 통학생들은 곧바로 광주중학교 기숙사에 연락했고 사생들 수십 명은 나무칼, 단도 등을 들고 나와 “광주고보생 타도, 조선학생 타도”를 외치면서 충돌 현장인 광주역으로 몰려왔다.

한편,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들도 기숙사에 연락해 사생들 수십 명이 야구방망이를 들고 현장에 나타나자 두 학교 학생간에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었으며, 일본인 순사, 소방대원, 양교 교직원들의 저지로 겨우 진정되어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은 일단 학교로 돌아왔다.

격렬한 싸움이 끝난 후, 광주고등학교 학생들은 종합적으로 결론을 내리고 이번 일을 일본 제국주의 타도의 계기로 삼기로 했으며, 이 결정사항을 광주 시내에 있는 중등학교와 다른 보통학교에까지 전달했다.

이러한 행동 강령이 나오기까지는 광주고등보통학교 독서회원들의 활약이 컸다. 배후에서 지도하고 있던 장재성은 ‘독서회 중앙본부’에서 활동하던 사람이었다. 이러한 행동 결의 사항은 수피아여자고등보통학교 독서회에도 알려졌고, 독서회 회원들은 전 수피아 여학생들에게 전해 주었다.

광주에 있는 한국인 학교 ‘독서회’ 대표자들은 장재성이 기초한 격문을 승인하고 그 격문을 각급 독서회 회원들을 통해서 배포하기로 했다. 이에 수피아여자고등학교 독서회 회원들은 격문을 암암리에 배포했다.

안영로 목사

· 90회 증경총회장

· 광주서남교회

공유하기

Comments are clo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