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나는 새로운 다짐을 했다. 몇 끼니를 굶고 산에서 흘러 내려오는 물만 먹고산다 할지라도 권력이나 사람에게는 결코 기대하지 알겠다고 말이다. 나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믿음으로 맡길 때만 앞날이 열린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로부터 30여 년이 지난 오늘, 국가와 사회를 위해 대통령이나 국무총리도 할 수 없는 일을 수행한 것은 역설적이게도 그 당시 국무총리가 만나 주지 않았기 때문에 이루어 놓은 공헌이기도 하다. 만일 그때 국무총리가 나를 만나서 일터를 소개해 주고 동정으로 몇 푼의 돈을 주었다면 나는 그것으로 만족했을 것이다.
지난 25년간 푼푼이 모은 기금으로 어두운 사회 한구석을 밝히며 남을 위해 살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케 하셨도다”(시 40:1-2).
한국 최초 시각장애인연합교회 탄생
선교란 교회가 일차적 대상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시각장애인선교 역시 저들을 위한 교회를 설립하는 일부터 시작되어야만 했다. 나는 곽안전 선교사를 찾았다.
“곽 선교사님, 시각장애인 선교의 터전을 잡기 위해 교회를 세워야 하는데, 저를 도와주실 수 있겠습니까?”
“아, 마침 영국 선교사 한 분이 한국에 나와 혼혈아들을 위해 일하고 있습니다. 함께 동역해 보시면 어떨까요?”
남산 3호 터널 입구에서 시각장애인연합교회를 개척할 때 겪은 생활의 어려움은 영국 선교사와의 공동 사역을 통해 조금씩 풀어 나갈 수 있었다.
그 당시 나에게는 한 살 난 어린 딸이 있었기에 가장인 나는 생활의 책임과 부담을 느끼던 터라 선교 지원이 절실하게 필요하던 때였다. 나는 백방으로 다니면서 시각장애인선교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한번은 하도 답답해서 동기 졸업생 몇 사람과 함께 한경직 목사님을 찾은 적이 있었다. 우리는 영락교회에서 시각장애인선교 기금 마련을 위해 헌금해 주셨으면 좋겠다고 간청했다. 그러자 한 목사님은 시각장애인선교 사역을 위해 축복 기도를 해주셨다.
나는 그 기도의 힘을 입고 다시 선교헌금을 구할 수 있는 곳이면 주저 없이 달려나갔다. 드디어 나는 시각장애인선교회의 기초가 될 개척 교회를 세우려는 꿈을 가까운 친구 박석권 목사와 함께 펼칠 수 있게 되었다.
사실 나는 시각장애인학교 정규 과정을 밟지 않았으므로 시각장애인의 현실을 깊이 인식하지 못했다. 이와 같은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박 목사가 시각장애인을 직접 찾아 나서기로 하고 나는 내외부 행정과 문서 홍보를 담당하기로 했다.
어느 시각장애인 교우의 도움으로 1972년 1월 첫째 주일에 시각장애인연합교회를 창립하게 되었다. 그 뒤 충무교회 고등부실을 빌려 5년 간 예배를 드렸는데 이런 상황도 계속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충무교회에서 나가 달라는 요청이 왔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다시 예배 장소를 물색하던 중 회현동 한구석에 쓰러져 가는 시범APT를 빌려 여러 해 동안 예배를 드려 오다가 어렵게 개인 주택을 매입하고 예배실로 개조해 예배를 드렸다.
그 후 영락교회와의 오랜 접촉과 설득 끝에 남산 터널 입구의 언덕 위에 한국에서는 첫 번째로 시각장애인교회를 정식 설계하고 건축하게 되었다.
시각장애인연합교회에 출석하는 시각장애인에 의해 서서히 배가운동이 되기 시작하자 나는 시각장애인을 위해 일차적으로 대한성서공회의 협력을 얻어 점자 성경책을 발행하게 되었다. 개인적으로도 보급했고 모든 시각장애인학교와 고아원에도 점자로 된 성경을 비치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노력했다.
김선태 목사
<실로암안과병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