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정치나 기업, 학문을 비롯한 종교 활동을 하며 사회 활동과 관계되는 여러 일들을 자신도 모르게 하게 되는 경우가 다반사다. 다시 말하자면 자신도 모르게 일하며 실천하는 데서 그 이유를 어느 날 갑자기 알게 되고 나도 모르게 조금씩 유명해져서 자연적으로 나의 이름 석 자도 자천타천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오르내리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어느덧 내 주위에 이미 와있는 여러 사회적 직책과 직무를 맡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일생을 살아가면서 가장 부담 없이 몸에 와 닿는 자연스런 여러 현상들이 삶과 생활에 연계된 경우가 바로 이런 순수 사회 활동이라고 지칭하고 싶다.
삼십여 년이 훌쩍 지난 1980년대의 어느 날인가, 비바람이 심하게 몰아치고 난 이튿날 문현동 언덕배기를 거닐면서 초라한 양철 지붕을 한 작은 집 담벼락이 5m쯤 유실되어 떨어져 나간 것을 보았다.
위를 쳐다보니 한 노구의 할머니가 지팡이를 짚은 한 노인을 부축하며 시름없이 근심 걱정 가득 담아 그 광경을 초점 흐린 눈으로 바라보는 것을 보고는 말할 수 없이 마음이 안타까웠다. 보기에도 노부부가 간신히 거주하는 주거임을 인지할 수 있었다.
마침 그날 하던 일을 일찍 서둘러 마무리하고 오후 무렵 그 집 앞을 지나려니 아까 아침에 본 무너진 담벼락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 사이 담벼락에 돌 몇 개가 정성스레 쌓여져 있지 않은가.
그 병들고 쇠약한 노부부가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누군가 사정을 잘 아는 분이 그 노부부의 형편을 알고는 힘겹게 봉사한 것이 분명해 보였다. 나도 그 집 앞에서 윗저고리를 한쪽 담장에 걸쳐 놓고는 무너진 돌 몇 개를 정성스레 고르게 쌓아 놓고는 아쉬운 발걸음을 돌렸다.
그리고 아침에 다시 그 집 앞을 지나려니 노동풍의 젊은 중년의 남자 둘이 흩어진 돌담 몇 개를 쌓는 것이 아닌가. 나도 모르게 이 세상에는 선량하고 마음 착한 분들이 많이 있구나 하고 감격해 하며 마침 볼일이 있어 어디로 가는 길이었지만, 저고리를 벗어놓고 동참을 하니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집의 얕은 담벼락 모양이 좀은 어설프지만 처음처럼 모양을 갖추게 된 것이다.
어떤 이익이나 대가를 바라지 않고 함께 어렵고 힘든 일에 동참한다는 것은 얼마나 흐뭇한 마음인가. 이날 이후 며칠은 가슴 뿌듯한 마음으로 모처럼 좋은 일을 했다는 기분으로 즐거움을 가득 가질 수 있었다.
이 각박하고 힘든 세상에 그래도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은 얼마나 사회적 큰 자산인가. 그리고 며칠 뒤 그 집 앞을 지나려니 돌담 쌓은 곳에 시멘트가 가지런히 발라져 있지 않은가. 누군가가 돌담으로 위태한 노부부의 집의 사정을 알고는 시멘트로 그 집의 담을 마무리 한 것이 분명했다.
참으로 신선한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노부부의 환하게 웃는 모습을 연상하며 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밝고 맑은 아름다운 사람들이 각기 곳곳에서 자기 역할을 하며 남을 돕는 작은 여유도 갖고 있구나 생각하니 우리 국민들에게 그 어떤 기대와 희망도 가져도 좋겠다는 마음까지 들었다.
지금도 어떤 명령으로 이뤄진 것이 아닌 대가없는 봉사의 정신으로 이루어진 그때 그날의 일은 마음 속 깊이 각인되고 있다.
그렇다. 우리는 누구나 행복과 불행을 가지지만 언제 어느 순간 시련과 고통은 함께 하는 여러 유형의 불행과 맞닥뜨리게 된다. 좌절하고 실패할 이때 누군가가 위안과 위로와 정성어린 작은 협력이 삶의 의지를 보다 더해주고 우리 인간에게 믿음과 신뢰를 쌓아가는 하나의 동력으로 재생된다는 점은 명심해야 할 것이다.
내가 처음 순수 사회 활동을 시작한 것은 1974년 5월의 ‘국제 와이즈맨 부산 알파 클럽’ 회원으로 시작해 1981년 ‘대한노인회’ 부산 남구 자문위원과 1983년의 ‘부산 YMCA’ 회원 모집이사를 한 것으로 출발한 것이다.
일정한 수고비나 거마비도 없이 말 그대로 아무런 명예나 권력도 가질 수 없는 자리였지만, 남을 위하고 배려하고 봉사하는 마음으로 늘 기꺼이 응해 왔다. 하나의 작은 씨앗으로 시작해도 언젠가는 마음의 감동과 결실로 환원된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YMCA 회원 모집 이사를 하면서도 나름대로 나와 인연이 있거나 사회 각계 각층의 요직에 있는 분들이나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YMCA의 취지와 목적을 설명하고 딴에는 열변을 토하며 회원모집에 열과 성의를 다할 때가 마치 엊그제 같다.
이후 1987년에는 ‘부산광역시 위민위원’ 봉사위원과 1988년엔 ‘부산남구 청소년 지도위원’으로 활약하며 결손가정과 조손가정에서 비뚤어진 사회관을 가지거나 불량모임에 나가는 청소년들을 선도하며 사회악의 구렁텅이에 빠지기 일보 직전에 마음을 돌이키는 데 일조를 하며 보람을 느끼기도 했다.
이는 절대적으로 누가 시키거나 명령해서 한 것이 아니라 순전히 내 스스로 마음 안에서 우러나오는 긍정적인 생각이 우선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바르게살기남구협의회’ 고문으로도 활약하며 정직과 도덕, 그리고 우리사회의 윤리를 위한 여러 형태의 모임에 선도자적 역할로 그 동안 내가 쌓아온 사회, 정치, 기업인과 종교인으로서의 경험과 체험을 바탕으로 꾸준한 협력체와 바탕을 만드는 데 능동적으로 모든 일에 앞장서려 애썼다.
자기 시간을 쪼개고 나누어서 힘들고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봉사한다는 것은 얼마나 큰 보람이랴. 그 순수한 열정 속에 나 하나의 정신과 육신도 함께 했다니 이 또한 얼마나 광명인가.
양한석 장로
• 문현중앙교회
• 시인
• 정치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