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이슈] 한국교회 순교자들 (4) 김병조 목사 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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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조와 유여대 3‧1 독립운동 참여

상해 임시정부 의정원 활동 등 외교중점

이날 밤 모임에서 김병조와 유여대는 거사에 관한 한 이승훈을 전적으로 신임해 민족대표 서명을 위한 인장도 그에게 위임했다. 2월 14일 김병조와 유여대가 다시 양전백의 집을 찾아 도장을 맡긴 사실에서 사전 결의가 실행에 옮겨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내용은 3·1 독립운동 관련 공판기록에서도 확인되었다.

이것으로 1919년 3월 1일 태화관 선언식에 김병조, 유여대가 불참하게 된 경위도 설명되었다. 즉 2월 12일 논의에서 거사 당일 이들은 평북 지역의 시위와 독립선언서 배포 등의 임무를 맡기로 모의된 것이었다. 아래의 글에서 거사 당일 김병조의 동선이 확인되었다.

“의주는 유여대, 김병조, 김승만, 장덕로 4인이 음력 정월 10일에 평북노회 축하차로 선천에 가서 양전백의 집에서 십여 동지로 더불어 국가의 광복을 논의한 후 의주 일대의 거사는 4인이 분담하고 김병조, 김승만은 비밀기관의 간부가 되고, 유여대는 시위운동의 회장이 되어 운명에서 태극기와 선언서를 준비하며 50여 교회와 사회 각 단체에 통고문을 밀포하여 2월 29일 밤에 군내 양실 학원에서 회의하고, 다음 날 경성 전(京城 前)에 와서 즉시 이원익, 김창수, 안석응 3인으로 선언서를 도, 군, 양 청급 경무국 헌병대에 전달하고 시민에게 고르게 한 후.”

위에서 3월 1일 거사와 관련해 비밀기관이 등장하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이 시기 해외 운동과 국내를 연결하는 비밀기관의 설치가 중요했고, 이 일에 상해 신한청년당과 서북 기독교계의 논의하에 김승만, 김병조 등이 참여하기로 모의했다. 이를 위해 김승만은 이승훈으로부터 900원의 자금을 지원받아 안동으로 건너갔고, 김병조는 해외로 나가기 전 먼저 평북 일대 잠행을 결의했다.

1919년 3월 1일 태화관 독립선언식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중 평북 출신자들은 이승훈, 양전백, 유여대, 김병조, 이명룡 등 5인이었다. 의주는 서울과 함께 전국에서 가장 먼저 만세시위가 시작된 곳으로, 3월 1일부터 4월 4일까지 총 44회 시위가 전개되었다. 거사 당일 김병조는 유여대, 이원익, 김창수, 안석응 등과 함께 의주 시위에 참여했고, 평북 도내 각처를 돌며 격문을 전달하는 등 ‘비밀 통신’ 임무를 수행했다.

이때 김병조의 순행에 동행했던 용천 출신의 홍원범의 증언을 통해서도 이러한 내용이 확인되었다. 평북 일대를 순행해 시위에 참여한 김병조는 3월 25일 밤 의주로 돌아와 집에는 기별하지 못한 채 상해로 출발했다. 신의주를 거쳐서 얼어붙은 압록강 철교를 건넌 김병조는 안동에서 영국 상선을 타고 15일 후 1919년 4월 10일 상해에 도착했다.

상해에 도착한 후 김병조 목사는 임시정부 의정원 활동을 중심으로 한인교회 목회, 교육, 저술 활동 등 다방면에 걸쳐 해외 민족운동에 참여했다. 김병조 목사가 상해에 도착한 4월 10일은 제1회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회의가 개최된 날이며, 김병조는 4월 22일 제2회 회의부터 의정원 의원으로 참석했고, 4월 30일부터 개최된 제4회 회의에서 손정도, 김현식, 이광수, 이원익, 이희민 등과 함께 평안도 대표로 참석했다.

김병조 목사는 7월 7~19일 의정원 제5차 회의 중 2일째 상임위원회 조직에서 법제위원회 이사로 임명되었으며, 8월 18일부터 9월 17일까지 의정원 장소를 개자이로에서 하비로 민단 사무소로 옮겨 개최된 제6차 회의에서 외교위원회 상임위원장이 되어 1920년 3월 25일 의정원 의원직을 사임하기까지 임시정부에서 활동했다.

김병조의 의정원 활동은 외교 관계 문서 작성과 역사편찬사업 등 주로 언론 홍보 활동에 관계되었다. 이는 초기 임시정부 활동이 외교 노선에 비중을 둔 연장선에서 이해될 수 있다.

이승하 목사<해방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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