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 전라도가 고향이지요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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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여성들에게 희망 전한 사랑의 선교

이일성경학교와 서서평 여선교사

“저는 오갈 데가 없습니다”

32세의 처녀의 몸으로 쉐핑(Miss Elisabeth J. Shepping. 한국명 : 서서평, 이하 서서평으로 표기) 선교사가 한국에 상륙할 때는 1912년 봄이었다. 이미 한국은 포악한 일제의 경찰관과 헌병 정치에 굴복한 지 2년이 지난 상태였다. 한반도 곳곳에서 일본인의 횡포는 극심했다. 땅을 빼앗긴 사람, 남편을 잃은 사람, 직장을 잃은 사람, 어디를 가나 사람들의 눈은 눈물로 가득했다.

광주에 도착한 서서평 선교사는 큰 충격을 받았다. 마치 여리고 도상에서 강도 만난 사람이 광주 사람이었고 전라도 땅에 사는 모든 이들이 그렇게 보였다.

‘옳지. 내가 사마리아인이 되자.’

이것이 서서평 선교사의 뜻이었다. 그는 이미 성경학교에서 배운 그리스도의 사랑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알고 있었다.

서서평 선교사는 미국에서 습득한 간호기술로 한국인을 치료해 주었다. 그녀는 어학을 배울 시간도 없이 직접 현장에 뛰어들었다.

1910년 호남 선교사들의 활동이 대단히 활발한 시기여서 선교사가 수직으로 부족한 때였다. 이러한 관계로 서서평 선교사는 군산 구암병원과 광주 제중병원을 오가면서 환자를 치료해 주었다. 그녀의 기술은 남달리 뛰어나서 여기저기 병원에서 그녀를 많이 청했다. 그래서 그녀는 서울에 있는 세브란스병원에까지 가서 간호사로, 부속 간호전문학교 교수로 활동했다.

서서평 선교사는 광주나병원에서 활동하다가 평양신학교에 진학한 최흥종 장로가 그만 서울에서 3.1독립 만세를 부르다가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최흥종 장로가 갇혀 있는 서대문 형무소를 방문해 영치금도 넣어주고 수형생활에 필요한 필수품도 대주었다.

결국 이 일로 신변의 불편함을 느낀 서서평 선교사는 다시 광주 제중병원으로 내려와서 간호사로 활동하다가 뜻하지 않게 어느 버림받은 여인을 시골 교회에서 만나게 되었다.

“아니, 아들을 못 낳는다고 집에서 쫓아내요?”

울면서 하는 어느 여인의 딱한 이야기에 그녀는 귀를 기울였다. 옆에 있는 교역자는 서서평 선교사에게 한국 여성의 지위에 대해서 자세하게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선교사님, 저는 오갈 데가 없습니다.”

“아니 친정은 있지 않습니까?”

“한국에서는 한 번 결혼하면 다시는 친정에 갈 수 없습니다.”

딱한 사정을 듣고 있던 그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천장만 쳐다보다가 결정을 내렸다.

“아주머니, 그러지 말고 광주 우리 집으로 갑시다.”

서서평 선교사는 광주 양림동에 있는 자기의 집으로 이 여인을 데리고 갔다. 그녀는 매주 주일만 되면 시골 교회를 방문했다. 그리고 마을마다 다니면서 개인전도를 했는데 개인전도를 하면 꼭 교회로 인도해서 교역자에게 정확하게 인계를 하곤 했다.

그런데 그녀는 가는 곳마다 딱한 처지에 놓여 있는 여성을 만났다. 어느 주일에는 무식하다고 해서 쫓겨난 부인을 만나게 되었다. 당시 한국 여성들은 한글을 모르는 사람이 많았다. 그 여인의 남편은 서울을 드나들면서 갑자기 돈을 많이 벌게 되어 서울에 첩을 두고는 큰소리를 치면서 지방에서 유지 행세를 했다.

이 여인은 시골에서 자랐기 때문에 외모를 가꿀 줄도 모르고, 더군다나 남편보다 연상이어서 이 돈 많은 남자에게는 흥미 없는 여자였다. 집에서 맞고 쫓겨난 이 여인은 광주 양림동에 있는 서서평 선교사의 집에 머물게 되었다.

정확한 날짜는 알 수 없지만, 1922년 몇 명 안 되는 한국인 여성들을 중심으로 해서 교육을 실시한 것이 후에 광주 이일성경학교가 되었다.

광주 시내뿐만 아니라 시골 교회에까지 다니면서 전도를 하자 여러 곳에서 학생들이 몰려왔다. 서서평 선교사는 오원기념각으로 장소를 옮겨 15세 난 여자로부터 시작해서 40세의 불우한 여성들을 위해 배움의 터전을 마련했다.

이일성경학교의 학제는 보통과 6년 과정을 4년에 마치는 특수학교였으며, 보통과를 마친 사람들은 성경과에 지원해서 3년 과정을 마쳐야 하는 간이 학교 제도였다.

모든 것이 무료였다. 요즘 말로는 전액 장학금을 받고 공부하는 학교였다. 그저 몸만 가면 학교에서 입학금, 등록금을 해결해 주었다. 그들의 숙소는 서서평 선교사의 집과 오원기념각 작은 방이었다.

서서평 선교사의 아름다운 선교 미담이 본국에 알려지자 북캐롤라이나 샤롯데에 사는 그녀의 친구 니일(Miss Lois Neel)이 원조금을 지원했다. 그 원조금으로 양림동 선교사촌 옆에 3층 벽돌로 학교 건물을 지었다. 그리고 그 학교의 명칭을 헌금했던 니일의 이름을 따서 ‘광주 이일성경학교’라 했다.

이렇게 해서 출발한 광주 이일성경학교는 농촌 여성지도자들이 많이 배출되면서 한국 농촌 선교에 큰 역할을 했다.

이 학교는 불우한 여성들의 교육기관이었지만 이곳 출신의 학생들은 거의 전도사 또는 목사 부인이 되기도 했다. 호남신학교 교장을 역임했던 브라운(G. T. Brown. 한국명: 부명광) 박사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 학교에서는 후일 전도부인, 선생 그리고 목사 부인들이 된 많은 여성들을 배출했습니다. 이들 여성의 대부분은 작은 시골 동네에서 알려지지 않고 인정받지 못한 채 피땀 흘려 노력만 했던 여러 명의 주인공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믿지 않는 마음에 발 붙일 수 있도록 발판 역할을 하는 돌격대의 일을 했고, 선교사, 전도사, 목사들은 그들의 뒤를 이어 침투를 했습니다.”

이렇게 훌륭한 인물을 배출한 선교사 서서평은 이일성경학교의 설립자였으며, 교장이 되었다. 그녀는 점점 바빠지기 시작했다. 광주 제중병원 간호사의 직무를 담당해야 했고, 이일학교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의 직무도 담당해야 했으며, 주일이면 가난한 농촌 교회를 돌아다니면서 전도도 해야 했다.

안영로 목사

· 90회 증경총회장

· 광주서남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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