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변화의 기적… 섬김으로 이끈 공동체의 회복
수련회로 이끈 대화로 갈등의 벽 허물어
장로의 소명, 한국교회 미래 향한 성찰
오래 울고 있는 아이를 달랠 때 “강아지 보러 갈까?”와 같이 작은 제안을 하면 효과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치고 싶은데 방법을 모를 때 명분을 주는 셈이기 때문이다. 예쁘게 디자인된 하얀 티셔츠 한 장은 머뭇거리던 사람들에게 ‘참석해 보자’고 용기를 내도록 하는 작은 계기가 됐다. 그렇게 격식 없고 꾸밈없는 것일수록 큰 변화를 이끌 수 있다.
프로그램도 특별하게 짜지 않고 서로 평범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충분히 가지도록 했다. 따라온 부목사도 20분 동안 오픈마인드 대화법과 대화 주제만 전달하고 돌아갔다. 12명씩 조별로 방에 들어가 이야기를 나누도록 했다. 복잡한 프로그램을 피하고 마음이 열리는 만남이 되도록 집중했다. 그러자 저녁 9시 30분까지 끝나기로 정해져 있던 시간을 훌쩍 넘겨 새벽 1시까지 진지한 대화가 이어졌다. 지독하게 얽혀 있던 관계들이 눈 녹듯이 풀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수련회에 다녀온 뒤로 사람들은 몰라보게 편안해졌다. 끼리끼리만 몰려다니던 벽이 드디어 허물어졌고, 눈인사도 없던 사람들이 만나면 반갑게 포옹을 하는 기적이 일어났다.
이후로 우리 성가대는 많은 일을 함께했다. 합창곡 CD를 제작하기도 했다. 명 성가곡을 오랫동안 연습한 뒤 전문 CD 제작업체에 의뢰해 본당에 설치한 녹음설비를 통해 녹음했다. 자정이 넘도록 녹음이 진행되는데도 피곤한 줄도 모르고 즐겁게 찬양을 했다. 3천 장 제작한 이 성가 CD는 여러 곳에 선물로 보내기도 하고 교회 서점에서 팔아 선교 헌금을 마련하기도 했다. 여러 가지 활동들이 활발해졌을 때쯤 한 여성 권사님이 농담을 하셨다.
“장로님은 우리 뜻대로 다해주는 것 같지만 가만 보면 장로님 뜻대로 백 퍼센트 다하십니다.”
지금도 교회에서 그때 함께했던 대원들을 만나면 서로 눈을 마주치는 게 기쁘다. “그때 참 행복했어요”라는 말을 듣기도 한다.
이해관계가 있는 갈등은 조정이 가능하지만 영적인 자존심의 갈등은 사람이 나서서 조정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다만 오래 참고 시기하지 않으면 극복될 수 있다.
교회라고 해서 갈등 자체가 없기를 바랄 수는 없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 갈등은 필연적이다. 오히려 그것이 성장 에너지가 될 수도 있다. 극복될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는 것이 예수님의 제자로서 우리가 지켜야 할 ‘이웃 사랑’의 계명이다. 그리고 그 과정이 아무리 힘들더라도 장로라면 기쁘게 감당해야 한다.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구원받은 자로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감당하는 기쁨’을 맛볼 줄 아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축복이자 영광이기 때문이다.
목숨 걸고 섬겨야 하는 직분, 장로
소망교회 시무장로 은퇴를 2년 앞둔 2007년 11월 23일, 나는 명성교회 월드글로리아센터에서 열린 대한예수교장로회 전국장로회연합회 정기총회에서 회장으로 선출됐다. 전국 64개 노회 2만7천 명의 장로를 대표하게 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난생 처음 선거운동이라는 것을 해봤다. 20대 때부터 교회와 노회, 총회, 연합회에서 참 많은 회장을 했고 책임을 맡았지만 “저를 뽑아주십시오”라고 부탁하고 다니기는 처음이었다. 다만 대부분 선거에서 통하는 ‘돈을 써야 당선된다’는 공식은 내게는 거꾸로 작용했다. 선거 기간 동안은 선거법에 저촉되기 때문에 밥값도 일절 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늘 내가 밥값을 내던 자리도 “나는 후보가 돼서 밥값을 낼 수 없다”고 하면 다들 웃었다. 상대 후보도 돈 쓸 형편이 안돼 돈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서로 핑계가 좋았고 나름대로 공정한 선거가 될 수 있었다.
선거 과정 동안 내가 떠올렸던 것은 1987년 미국 시카고 교회들을 탐방한 일이었다. 그 해 교단 강남노회와 미국 시카고노회가 파트너십 결연을 맺었고 강남노회 대표단이 시카고노회의 도움으로 시카고 매코믹 신학대학교에서 열흘 동안 학교 기숙사에 투숙하며 목회 세미나에 참여했다.
재정 담당으로 함께 간 나를 제외한 나머지 일행은 모두 목사님들이었다. 당시 교회학교 보직을 맡고 있던 나는 시카고 교회들을 둘러볼 때 교회학교를 집중해서 살펴봤다. 그런데 어딜 가나 교회학교가 텅 비어 있었다. 당시 좁은 공간마다 미어터지도록 학생들이 바글바글했던 한국의 교회학교와는 천지 차이였다. 게다가 시카고 제일장로교회에 가보니 본당이 홈리스(노숙자)들로 가득 차 있었다. 100명 남짓한 교인들은 구석의 별실에서 예배를 드리고, 크고 화려한 본당은 홈리스들에게 식사를 대접하는 식당이 돼 있었던 것이다.
그곳 담임목사님은 “홈리스들을 섬기는 일이야말로 교회가 해야할 일”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 가치와 의미에 대해 느낀 바도 있었지만 왠지 큰 허전함이 전해져 왔다. 예배는 무너지고 봉사만 강조한다는 것은 교회의 본질이 실종된, 균형 감각을 잃은 모습으로 보였다.
이후 시카고 북쪽의 윌로크릭교회와 LA의 새들백교회 애틀랜타노스포인트교회 등 역동적이고 활발하게 성장하는 교회를 방문했을 때는 새로운 가능성에 가슴이 뛰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 성장하는 교회와 쇠락하는 미국 교회들의 차이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이 생겼다.
이렇게 교회가 무너지지 않기 위해서는 한국교회는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 미국에서 텅 비어가는 교회와 역동적으로 성장하는 교회들은 왜 그렇게 되었을까? 이 부분을 생각할수록 한국 교회의 수직적 권력 지향적, 권위적인 교회 문화에 대한 걱정이 생겼다.
박래창 장로
<소망교회 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