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자촌에서라도 함께 살 수만 있다면”
믿음만 보고 나를 선택한 아내는 군대 간 나를 3년이나 기다렸다. 그러나 내가 제대한 후에도 우리의 앞날은 막막했다. 가진 것도 없고 능력도 없던 나는 아내를 볼 때마다 마음이 아프고 미안했다.
“남대문에서 콩나물 장사를 하고, 판자촌에서 살더라도 같이 살 수만 있으면 좋겠다.”
우리는 만날 때마다 그런 얘기를 나눴지만 현실은 막막하기만 했다. 우리의 이런 간절한 마음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풀어 주셨다. 아내를 끔찍이 아끼던 할머니의 마음을 움직이신 것이다. 할머니는 첫 손녀인 아내를 위해서라면 뭐든 다 해주셨다. 몸이 약했던 아내가 장충동에서 군자동까지 학교 다니는 걸 보고 군자동에 집까지 사주신 분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선을 보라고 해도 아내가 나만 바라보고 있으니 이분이 답답해서 우리 누나를 찾아오셨다.
“둘이 저렇게 좋아하는데 결혼시킵시다. 먹고살 것이 없으면 보태주면 되지. 공부 마칠 때까지 내가 도와줄 테니 결혼 허락합시다.”
할머니 덕분에 우리는 결혼을 허락받았다. 하지만 막상 허락을 받고 나니 현실이 얼마나 초라한지 여과 없이 드러났다. 나는 이제 막 제대해 야간대학 2학년에 재학 중이었고, 친형이 사업에 실패해서 집안 형편이 너무 어려운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결혼하겠다고 하니 어머니는 물론이고 처가 쪽도 반가워하지 않았다. 중학교 교장 선생님인 장인어른은 사위가 무엇 하나 내세울 것 없는 사람이라 속상해하셨다.
결국 처음부터 끝까지 아내와 둘이서 결혼 준비를 해야 했다. 교회에 가서 날짜를 잡고, 신혼살림에 필요한 것들을 하나하나 장만했다. 패물은 생각도 못하고 금반지 두 돈으로 우리의 결혼을 기념했다. 처가에서 보내 준 10만 원으로 나 혼자 백화점에 가서 회색 양복과 밤색 구두를 사 신었다. 당시에는 신랑들이 대체로 감색 양복을 입고 결혼을 했다. 나는 결혼식에서 어떤 양복을 입는지 몰라 중년 신사처럼 회색 양복을 입고 결혼식을 치렀다. 거기다 전체적인 조화는 고려하지 않고 형의 고동색 넥타이를 빌려 맸다.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날 정도로 당시 나는 그야말로 촌뜨기 신랑의 모양새였다.
결혼식 당일에도 내가 아내를 직접 미용실에 데려다주고 교회까지 데려올 정도로 신경 써주거나 챙겨주는 사람이 없었다. 결혼식도 가족들만 모여서 조촐하게 치렀다. 토요일에 결혼식을 하고 다음 날 함께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고, 월요일 아침에 고속버스를 타고 설악산에 다녀온 게 신혼여행의 전부였다. 우리는 여관에 머물면서 시내버스를 타고 설악산 주위를 돌아다녔다. 남들은 신혼여행에서 찍은 사진만 따로 모아 놓은 앨범이 있지만 우리는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부탁해서 찍은 사진 몇 장이 전부다. 그 사진도 모두 차렷 자세로 찍어 어색하기 그지없다. 아내가 얼마나 절약을 했는지 여행 경비 10만 원에서 3만 원을 남겨서 우리 어머니께 드렸다. 돌이켜보면 우리의 시작은 참으로 미약했다.
이은태 목사
뉴질랜드 선교센터 이사장
Auckland International Church 담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