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 안수 받던 날
내가 시각장애인연합교회를 창설하고 점자 성경, 찬송을 보급하던 중 1973년 그렇게도 간절히 소망하던 목사 안수를 받게 되었다. 안수위원들이 나와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하는 순간 성령의 강한 임재를 깊이 체험하게 되었다. 나는 하나님의 깊고도 넓은 사랑에 감격해 눈물로 감사 기도를 드렸다. 20여 년 전 고모 집을 탈출할 때 “하나님, 저를 살려만 주시면 목사가 되어 주님의 일을 꼭 하겠습니다”라고 했던 기도가 생각났다.
그때의 기도대로 주께서 지나간 20여 년 동안을 한결같이 지켜 주셨고 온갖 시련과 어려움도 극복하게 하시며 목회자의 자질과 지도력을 키워 주셨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산하 서울노회에서 시각장애인선교를 위해 목사 안수를 받은 후 선교 활동 범위가 더욱 넓어지게 되었다.
목사 안수를 받게 되자 주변 인식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1973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는 전도부 안에 시각장애인선교회를 창설하고 초대 총무로 나를 초빙했다. 지금까지 사역하던 시각장애인연합교회를 사임하고 총회 전도부에 부임하게 되자 내 후임으로는 나와 함께 동역했던 박석권 목사가 목회를 전담하게 되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신학과 목회를 연구할 때 기도하고 세워 놓았던 시각장애인선교의 비전과 프로그램을 전문적으로 실천해 나갈 수 있게 된 것이다. 내가 선뜻 그곳에서 일할 결심을 하게 된 것은 전도부가 통합측 교단의 전도 정책 중 시각장애인선교사업을 결정하고 행할 수 있는 저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각장애인선교 정책도 입안이 되면 전국 교회에서 선교 지원을 구체적으로 받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발견한 것이다.
나는 한국교회 시각장애인선교의 정책 입안자란 중대한 사명을 맡고 그것을 이끌어 나아갈 책임자가 되었다. 하지만 시각장애인선교회 총무라는 자리도 말뿐이지 전도부 산하 기관이어서 무에서 유를 창조해야만 하는 외로운 자리였다. 나는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욥 8:7)는 말씀을 믿고 우선 해야 할 일을 찾아 나섰다.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에는 20만 명의 순수한 시각장애인이 있고 0.2 이하의 저시력자가 500만 명에 이른다. 나는 그들에게 먼저 무엇을 해줄까 생각하다가 점자 성경과 찬송을 만들어 각 교회와 시각장애인학교 그리고 안마원에 보내는 일을 시작했다. 반응은 좋았다. 더 많은 점자 성경과 찬송을 만들어 보내 달라는 요청에 따라 선교헌금이 들어오는 대로 공급하게 되었다.
내가 이 일과 병행해서 시작한 또 하나의 일은 시각장애인을 위한 장학금을 마련하는 일이었다. 시각장애인학교 학생들에게 장학금 혜택을 받게 하면서 각자의 소질에 따라 알맞은 교육기관으로 배치하는 것이다. 사명감에 불타는 이들은 신학원으로 보내 신학공부를 하게 한 뒤 시각장애인 기관에서 일할 수 있도록 장기 계획을 세웠다. 물론 음악에 소질이 있으면 음악원으로 보내어서 선교사역에 봉사할 수 있도록 주선했다.
1998년까지 25년 간 900명의 시각장애인 대학생과 신학생에게 장학금을 지급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도록 나와 같은 존재를 사용하신 하나님을 어찌 찬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의 불타는 선교 열망은 그것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통합측 총회 전도부에 소속되어 내게 주어지는 어떠한 직책도 마다하지 않고 성실한 황소처럼 묵묵하게 버티고 나갔다. 나는 1972년부터 지금까지 사회복지법인 시각장애인 대린원 이사직을 맡아 왔고, 1972년부터 1976년까지 시각장애인전도협의회 총무 일도 맡았었다. 또한 1977년부터 1978년까지 아세아시각장애인선교대회 총무도 역임했다.
나의 선교 영역은 국내에만 국한시킬 수는 없었다. 미국과 캐나다, 일본과 필리핀, 유럽 지역까지 서서히 교포 교회들을 중심으로 넓혀 나갔다. 국내의 선교 헌금만으로는 시각장애인선교를 위한 기금이 너무나도 부족했기 때문이다.
김선태 목사
<실로암안과병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