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민 행정의 가장 말단기관인 동사무소를 비롯한 각 관공서 같은 데서는 불친절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필요한 구비서류 하나에도 급행료를 주어야만 우선순위가 결정되는 일이 다반사였던 시대였다.
1987년부터 사회정화위원을 위촉받고 또한 관내의 남부경찰서 선진질서 운영위원을 하고 있어 대략은 알고 있었지만 현장점검을 해 보니 이렇게 비참할 수가 없었다.
참으로 실감이 나지 않는 하루였다. 내가 소속한 남구에도 동리마다 가끔 불평등한 삶의 질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고 이것이 관에 대한 불신으로 작용한다는 엄연한 현실 앞에서 나는 어떤 식으로든 민원을 우선순위를 정해서 시급히 해결해야겠다는 마음작정부터 다짐했다.
몇 군데의 달동네를 나름대로 더 돌아보고는 해가 저물어서야 돌아온 나는 그날 집에서 밤새도록 고민을 거듭했다. 열악한 시설에서 삶의 처절한 고통을 안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그들에게 내가 무엇부터 해야 할까. 내가 가지고 있는 권한과 능력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 하고 고민을 거듭했다.
밤은 점점 깊어가는데 확실한 대안을 찾기는 참으로 어려웠다. 그리고 민생의 중심이 우선해야만 치안도 바로 설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우선 주민 우선의 편안하고 편리한 즐거움이 곧 지방자치제의 목적이요 이상이라 생각하며 서민들이 가장 우선 접할 수 있는 민원기관인 각 동회부터 친절 우선으로 서민 행정과 지역 주민을 우선하고 챙기는 마음가짐을 공무원들이 스스로 갖도록 주지시키는 일에 전념하기로 했다.
민심이 곧 천심이 아닌가. 그래서 기회가 닿을 때마다 협조문은 물론 당시 구청장을 비롯한 관계 요로 공무원들에게 이해와 협조를 바라는 현장 방문을 적극 권하며 구의회 예산 편성에서 뒷받침할 여러 현안들을 적극적으로 행정지원을 하는 데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언젠가는 목적한 결실이 꼭 올 것임을 믿으며 열과 성의로 나의 책무를 다하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당시만 하더라도 인구수에 비례해 편성하던 구청 예산을 달동네와 빈촌위주로 편성하는 데 주안점을 두고 일부 반대하는 공직자나 담당자들을 설득하며 영향력 있는 고위관료들에게 첨예한 현지사정을 얘기하고 호응해 줄 것을 간곡히 부탁한 것이다.
그래서 처음의 우선순위로 맨처음 시작한 것이 빈촌마다 가장 서로의 고통이 되고 있는 공동화장실부터 개조해 위생적인 화장실을 만드는 일이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문현동과 우암동을 비롯한 용호동 일대는 옛날 6.25 때의 피난민 위주의 주거문화가 형성되어 있어 판잣집이나 양철집 같은 데서 너무나 작은 평수의 집에서 그것도 여러 세대들이 기거하다 보니 화장실이 태부족이었다. 한 마을에 2~3개 정도의 공동화장실을 이용하다 보니 아침이면 출근하는 노동자들과 학생들 부녀자들이 줄지어 서서 차례를 기다리느라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비위생적인 것은 물론 전염성의 우려마저 있어 시급한 문제였다. 사실 우암동은 그 옛날 우막촌이라 해서 소를 대량으로 키우던 곳이었다.
그리고 6.25 때의 피난민촌이 대단위로 바닷가 주변으로 형성되고 있어 귀환동포들과 생활 빈민들이 집단으로 기거하던 곳이었다. 이렇게 하루 벌어먹고 사는 사람들이니 공중도덕과 질서는 도통 외면되고 도의도 무시되는 그야말로 아비규환 자체였다.
직접 내가 작업복을 입고 솔선해서 나서 이 공동화장실 문제를 해결하려고 마음먹고 우선 화장실 개수를 늘이고 최소한의 위생적인 모습으로 탈바꿈시키려고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니 마을의 유지들도 모두 함께 동참하는 게 아닌가.
어느 정도 일의 진척을 이루자 그냥 구경하기만 하던 마을의 아주머니들이 새참으로 국수를 삶아주거나 과일 등을 직접 들고와서 격려하고 음료수나 커피 등을 일하는 분들에게 정성으로 나누어 주며 좋아라 하던 그 표정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여태까지 관에서 시늉만 하던 것을 위생적인 화장실을 하나씩 개조 완성해 나가자 마을사람들의 호응과 동참은 그야말로 나를 감동시켰다.
위에서 시켜서 행동하는 게 아니라 직접 구의회 의장이 작업복을 입고 솔선하고 있다는 파다한 소문이 주민들의 마음을 움직인 게 분명했다.
이심전심이라 했던가. 마을의 공동화장실이 새로이 하나씩 완성될 때마다 주민들, 특히 나이 많이 든 분들은 흙 묻은 내 손을 잡고는 감격해 하며 훌쩍였다. 학생들과 아주머니들이 좋아했음은 물론이다. 나 또한 보람도 느끼고 민심 안에서 더욱 큰 내일의 희망을 바라보는 계기가 되어 한없는 즐거움을 가져다주던 시기였다.
양한석 장로
• 문현중앙교회
• 시인
• 정치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