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향기] 총회 파송 김경식 선교사•김사라 선교사(콩고민주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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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교육의 열매로 콩고민주공화국 국민들 깨워”

총회 파송 김경식 선교사•김사라 선교사(콩고민주공화국)

김경식 선교사와 김사라 선교사는 1992년 콩고 수도 킨샤사에 도착해, 우리나라에 온 선교사가 140년 전에 교회 개척과 교육기관을 설립해 근대 교육과 민족의식과 독립 정신을 고취했던 것처럼, 지금까지 34년 동안 아프리카 빈민가에서 자라나는 어린이와 장애인 등에게 주님의 사랑인 복음과 근대교육 전파, 지금까지 콩고에서 ‘콩고를 이끌어가고 있는 믿음의 지도자’들을 길러내는 사역을 이어오고 있다.

콩고민주공화국 선교사로 부름받아

“1991년 12월 1일에 당시 본 교단 세계선교부 파송을 받아 아프리카 땅 자이레 공화국(1997년에 콩고민주공화국으로 개명)에서 사역을 시작했어요. 콩고민주공화국 수도 킨샤사에 도착했을 때는 1992년 4월로 기억해요. 당시에 군인 폭동과 내전 등으로 인해 거리에는 걸인들과 부랑자들도 많고, 장애인들도 많았어요. 가는 길목마다 먹을 것을 달라는 사람들로 넘쳤어요.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그들 곁으로 향하게 되었어요. 거리의 배고픈 자들을 위한 구제사역이 시작되었고, 거리의 걸인과 장애인, 부랑자들을 모아 망고 나무 아래에서 예배를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10-20여 명을 시작으로 많을 때는 200-300명을 대상으로 길가에서 빵을 나눠주고 설교하기를 시작했어요.”


콩고에서의 첫 사역은 소외된 이웃들과 함께 드린 길가에서의 예배였다. 이후 길가에서의 예배가 많은이들의 입소문을 타고 많은 사람들이 모이게 되면서 예배드릴 공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장애인 교회인 무쉬교회를 1995년에 건축하게 됐다. 콩고 최초의 장애인 교회였다. 장애인과 걸인, 부랑자를 위한 교회 무쉬교회를 시작으로 뽐빠쥐교회, 인질리교회, 은쎌레부마교회, 낀꼴레교회 등 5개 교회를 개척 후 건축 봉헌했다.
콩고민주공화국 교육의 아버지로 장애인과 부랑자들을 위한 구제 사역을 시작 후 김 선교사는 글자를 모르는 이들에게 교육을 시작하면서 ‘콩고의 페스탈로치’로 불리기 시작했다. 복음과 교육으로 콩고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마음으로 학교를 설립하게 되었다. 김 선교사는 유·초·중·고교등 중등교육기관을 세워 어려운 가정의 자녀들을 교육한 공로를 인정받아 콩고 민주공화국 정부로부터 시민공로훈장을 수상하기도 했다.
“장애인들과 걸인, 부랑자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주고, 아픈 이들에게는 약을 나누어 주었는데도 그들의 삶은 변화가 일어나지 않더라고요. 장애인들을 케어하다 보니 가난뿐만 아니라 장애도 대물림이 된다는 것에 너무 놀랐어요. 예를 들어 홍역에 걸린 아이를 위해 약을 주기도 했는데, 부모들은 약을 줘도 먹이지 않았어요. 약을 준다고 해도 글자를 모르니 어떻게 복용해야 하는지도 몰랐어요. 그로 인해 질병을 더 키우게 되었어요. 무지가 장애를 부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시작하게 된 것이 교육 사역을 시작해야 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어요.”


김 선교사는 아이들이 부모들의 무지로 병에 걸리고, 장애가 대물림 되는 것을 보고 교육 사역을 시작한 계기였다. 1996년 뽐빠쥐 유•초•중•고등학교 개교가 콩고 학생들에게는 배움의 길의 시작이 되었다. 이후 2000년에 링구알라 유•초•중•고등학교 개교, 2007년에 낀땀보 유•초•중•고등학교와 인질리 유•초•중•고등학교 개교, 2010년에 낀꼴레 유초중고등학교를 개교했다. 현재 5개 학교에는 5천여 명이 다니고 있다.
“학교 부지는 수도 킨샤사 변두리 땅 공동묘지였어요. 그래도 1천 평 이상 되는 땅으로 그것마저도 감사했죠. 95년에 건축을 시작해서 96년도에 개교를 했는데 사실 공동묘지 옆 땅이라 학생들이 올까 했어요. 걱정과 달리 많은 학생들이 입학을 했어요. 저희 학교의 특징은 개교 당시에도 컴퓨터 수업을 시켰어요. 당시에는 브라운관 컴퓨터 4대를 놓고 시작했는데 초등학교뿐만 아니라 중고등학교까지 컴퓨터 교육을 시킨 학교는 저희 학교 밖에 없었어요. 감사하게도 첫 해부터 800여 명의 학생들이 입학을 했어요.”
당시 콩고에서는 최초의 컴퓨터 교육이기 때문에 교육부 차관이 학교를 방문하면서 현지에서 큰 주목을 받기도 했다.
“한국교회 지원을 받아서 시작한 학교였기에 한국교회는 IMF로 인해 힘든 상황이었어요. 그런데 어느날 변두리 학교에서 애들을 모아서 컴퓨터 교육을 시킨다고 하니깐 교육부 차관이 학교를 방문했어요. 차관이 움직이니깐 기자들도 따라오면서 자동으로 돈을 들이지 않고도 홍보 효과가 된 거에요. 그로 인해 큰 주목을 받으면서, 학교가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어요. 콩고 정부에서 링구일라 구청을 지어달라기에 한국교회의 협력을 받아서 짓고, 그 대가로 킨샤사 시내 부근에 땅을 기증 받아 또 다른 학교를 설립했어요. 당시 콩고 상황도 어지러운 상황이었지만 대통령을 빼고는 정부의 장차관이 다 왔다 갔어요. 학교에서 잘 가르친다는 소문이 나서 학생들이 많이 입학을 했어요.”
고등학교는 매년 수능성적을 우수하게 치러 전국 혹은 지역 수석, 차석을 치지함으로 인해 명문 학교로 평가를 받고 있다. 학교에서는 매주 채플과 성경과목이 있는 미션스쿨로 교목을 통해 학생들의 신앙을 지도하고 있다.

교육방송국 CEBS 설립

콩고 정부는 김 선교사에게 학교를 더 지어 달라고 요청을 하기도 했다. 그것도 한 개 학교가 아닌 100개 학교를 지어달라고 요청했다. 1년에 1개씩 학교를 세워도 100년이 걸리는 일이기에 김 선교사는 정부에역 제안으로 한국에 있는 교육방송과 같이 100개의 학교 효과를 낼 수 있는 교육방송국을 설립하자고 제안했다.
“정부 관계자가 웃으면서 100개 학교를 세워달라는 얼굴 앞에서 안 된다고 할 수도 없었어요. 하나님께서 스치듯 지혜를 주신 것이 교육방송을 시작하는 것이었어요. 방송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데 맨몸으로 뛰어 들었어요. 콩고는 정말 전기가 흔해요. 강수 물량도 많지만 유속이 빨라 강 끝에 발전소가 있는데 풍부한 전기량을 보유하고 있어요. 풍부한 전기를 이용하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1998년 TV방송국과 FM방송국 라이센스를 취득했지만, 예산 등 여러 어려움으로 인해 2000년에 FM라디오 방송국, 2001년에 TV방송국인 CEBS(콩고 에듀케이션 브로드 시스템, CONGO ÉDUCATION BROADCATING SYSTÈME)를 개국하게 되었어요.”


김 선교사는 CEBS를 통해 선교(20%)와 교육(20%)을 비롯해 뉴스, 시사, 교양 등 다양한 컨텐츠를 아우르는 일반종합상업방송 카테고리로 라이센스를 취득한 것이어서 방송 장르에 상관없이 사역을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아픈 이야기이긴 하지만 평탄할 줄 알았던 방송국이 2009년쯤 파업이 있었어요. 저희 방송국이 선교, 교육 이외는 안했거든요. 카테고리를 풀자는 의견과 임금인상 건으로 파업을 했어요. 선교, 교육 프로그램만 하다보니깐 광고가 붙지 않는다는 이유였어요. 설득이 되지 않자 직원들은 임금을 올려주지 않아도 되니 카테고리를 풀자고 했어요. 광고가 붙으면 임금이 올라갈 수 있다는 기대감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직원들의 마음은 이해가 됐어요. 당시 저희방송국은 대통령실 취재가 허가된 방송국이었어요. 당시 메인앵커가 지금은 현직 공무부 장관까지 하고 있으니 나름 방송국이 좋은 곳이었다고 설명을 할 수가 있죠.”
김 선교사는 직원들의 파업으로 인해 마음고생이 심해 2010년쯤에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한 심근경색이 왔었다.
“복음을 전하는 방송과 교육을 위한 방송 프로그램을 상업적으로 풀자는 요구에 직원들의 마음은 이해가 됐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들어줄 수는 없었어요. 오직 기도하는 것 뿐이었어요.”
김경식 선교사는 CEBS를 설립하고 직원들의 파업으로 인해 힘든 시기도 겪었지만, 킨샤사 지역을 비롯한 전국지역 3천만 명이 방송을 시청하고 있으며, 케이블TV가 들어가는 지역까지 포함한다면 최소 1억 명 이상이 시청할 수도 있다고 했다.

종합대학교 설립해

당시의 고난이 또 다른 희망을 주었다는 김경식 선교사는 열악한 환경에 놓여 있는 콩고의 의료시설을 직접 몸으로 체험하면서 종학대학의 필요성을 느꼈다고 한다. 의과대학, 법과대학, 경제대학, 컴퓨터공학대학, 신문방송대학 등 5개 대학이 속한 레버런킴 종합대학교를 설립하게 되었다. 현재 재학생은 5천 500여 명에 이른다.
“심근경색으로 쓰러지면서 병원에 가게 되었어요. 보증금이 없으면 병원에 입원조차 못하게 했어요. 당시 병원에 있던 의사가 저를 알아보고 응급조치가 빨리 되었고, 일주일 정도 회복하고 서울에 와서 치료를 받았어요. 그러면서 단순한 생각으로 학교에 의대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시작이 되었어요. 저의 아내 김사라 선교사 혼자서 대학교를 개교하게 됐어요. 이후 2011년도에 의대와 법대를 신청했어요. 학교를 준비하신 분들이 있다면 어떻게 저렇게 쉽게 했냐고 할 정도에요. 단순하게 시작했어요. 그냥 신청하면 다 되는 줄 알았어요.”
대학교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라는 교훈을 통해서 영성과 진실함, 실력을 갖추도록 교육하고 있다. 콩고민주공화국에서는 학연주의, 부정부패가 만연하지만 학교에서는 일절 통하지 않는다. 그로 인해 졸업생은 20%밖에 되지 않는다. 의대와 법대뿐만 아니라 다른 학과도 마찬가지로 실력이 안 되면 퇴학 혹은 스스로 자퇴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졸업생들은 콩고민주공화국 곳곳에서 선한 리더십으로 역량을 발휘하고 있다.
“아시다시피 어느 나라든 법조인과 의료인은 정부에서 인원 조정을 해요. 그렇기에 의대, 법대를 신청한다고 해서 무조건 받아주지 않죠. 그런데 이런 내용조차도 몰랐던 저는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지혜롭게 의대, 법대를 신청했고, 정부에서는 허가를 해주었어요. 그렇기에 더욱더 학생들에게는 정직함을 강조했어요. 시험을 칠 때 부정행위를 하다가 적발이 되면 무조건 퇴학이에요. 하지만 현지인들은 착한 심성 때문에 결단력이 없어 퇴학을 잘 시키질 못해요. 특히 교수들에게 향응제공은 더더욱 못하도록 했어요. 정직함이 없다면 졸업을 한다고 해서 소용이 없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공부를 하지 못하면 졸업을 할 수가 없죠. 의사, 변호사, 검사, 판사 시험 등을 치르면 저희 대학 출신들이 합격률이 높다 보니 신규 대학에서 공부를 어떻게 시키는지에 대한 궁금점이 발생하기도 해요. 콩고 킨샤사에서 빅5에 들어가는 대학교에요. 학교 교훈처럼 진리를 통해 영성이 바탕이 된 정직함을 배운 지도자들을 배출할 수 있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있어요.”
이밖에도 도서관 장서들이 타 대학들에 비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고 김 선교사는 많은 장서들을 구입 확보하는데 어려운 과정들이 있어서 공간도 절약되고, 장서 구입이 필요 없는 전자도서관을 만들어 제공하고 있다.

킨샤사 인근에 건축 중인 의과대학 병원 조감도

킨샤사에 병원 건축 중

김 선교사는 의과대학을 설립 후 국립병원•사립병원과 MOU를 맺어서 임상실험 등 수업 전반에 필요한 실습을 제공하고 있다. 하지만 정부에서 병원을개원하라는 압박 아닌 압박이 있었다고 한다.
“의과대학은 다른 병원들과 협력을 해서 임상실험, 실습 등을 잘 해오며 탄탄하게 공부를 잘 시키고 있어요. 그런데 느닷없이 콩고 정부에서 병원을 언제 짓냐고 하는 거에요. 저는 처음에 농담 비슷하게 하는 말인줄 알았어요. 시간이 지나도 계획이 없는 저희 대학교에 정식으로 공문이 왔어요. 병원을 짓지 않으면 의과대학 허가를 취소하겠다는 통보를 받았어요. 이런 고민을 놓고 기도하던 중 한국에서 의사 장로님을 만났는데 학교 이야기를 했더니, 의대에는 병원이 같이 있다고 하셨어요. 병원이 좋지 않더라도 의대에는 병원이 있다는 것을 그제야 안거죠. 많은 기도와 협력을 바탕으로 2022년부터 병원을 건축 중에 있어요. 당시 샘병원 원장 故 박상은 장로님이 콩고에 오셔서 강의, 특강도 해주셨어요. 박 장로님이 ‘학생들 눈이 너무 또렷또렷해서 충격을 받았다’는 얘기를 하셨어요. 너무 감사한 이야기죠.”
김경식 선교사는 아프리카에서 의대를 처음 세운 선교사가 되었다. 병원은 아프리카 다른 나라에 모 교회에서 세운 병원들이 있다. 김 선교사는 “병원은 조금 늦었을지 몰라도 의대는 가장 먼저 세웠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병원이 한창 건축 중에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 한국교회가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마무리 단계에 와있는 병원이 잘 건축이 되도록 많은 기도와 협력을 부탁드립니다. 병 원을 통해서 치유의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모든 이들의 병이 깨끗이 치유 받고, 영혼도 깨끗이 치유 받는 곳이 되길 기도 부탁드립니다.”

기도의 힘을 믿어

김경식 선교사는 34년간의 사역 동안 오직 기도와 말씀만을 의지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간구해왔다. 콩고 민주공화국에는 본 교단 파송 3가정만 사역을 하고 있다고 한다. 이단들이 대량으로 물량공세를 해오다 보니 힘들기도 하지만 방송국을 통해서 이단의 잘못들을 알리고 있다.
“오직 기도 밖에 답이 없었어요. 34년간의 콩고민주공화국에서의 사역은 하나님의 은혜와 인도하심 밖에 없었어요. 유•초•중•고등학교 설립, 교육방송국 설립, 의과대학, 법과대학을 비롯한 종합대학 설립은 사람이 한 것처럼 보이지만,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세밀한 음성과 인도하심에서 시작이 된 것이에요. 특히,  영락교회와 소망교회를 비롯해 파송교회인 목민교회와 한국교회 성도들의 기도와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사역들이에요. 특히, 아프리카에는 이단들이 득실대죠. 알만한 이단들이 돈으로 밀고 들어와 있어요. 하지만 콩고에는 이단들이 들어왔어도 속된 말로 쪽을 못써요.”

김경식 선교사는 1998년 김대중 정부 시절에 정부수립 50주년 자랑스런 20인에 선정, 청와대에 초청되어 상을 받았다. 또한, 지난해에는 외교부 선정 대한민국 해외봉사상 국무총리 표창을 수상하기도 했다.

“반복적으로 말하게 되네요. 기도가 없었다면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거에요. 매일 저녁시간을 정해놓고 기도하고 있어요. 또한, 저를 후원해주시고, 한국교회 성도들의 강한 기도로 사역이 이루어졌어요. 지금은 자녀들 중 막내가 선교사 훈련을 받고 있어요. 막내가 태어난 콩고에서 선교사역을 하기 위해서 말이죠.”
콩고 땅에 첫발을 내딛은 이후 많은 것을 이룬 것처럼 보인 김 선교사이지만, 반복되는 고난의 시간들은 오히려 선교사역에 있어서 큰 힘을 이루며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박충인 기자

김경식 선교사와 김사라 선교사 인터뷰는 지난4월 16일 영락교회 선교부(부장 서상현 장로) 후원으로 진행되어, 선교전담 김진우 목사, 부장 서상현 장로와 선교부 임원, 제3여전도회 임원들이 배석했다.
– 편집자주

● 김경식 선교사·김사라 선교사
● e-mail : kskim33@gmail.com
● 한국 연락처 : 010-9400-4478
● 콩고 연락처 : 00243-823-614-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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