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세시위 운동 기획 등 적극적인 활동 전개
한중 양국간 친선 도모… 항일운동 기틀 마련
임시정부 산하 구미위원부가 이승만과 서재필을 국제연맹에 파견해 김규식과 함께 활동할 계획을 세우자, 임시정부 의정원은 제5회 의정원 회의에서 외무부장 안창호의 제의로 국제연맹에 제출할 ‘청원서’를 작성, 심의할 기구로 ‘국제연맹회 제출안건 작성 특별위원회’를 구성했는데 김병조, 오의선, 최창식, 정인과, 이춘숙 등 5인이 선정되었다.
이어 제6회 의정원 회의는 ‘국제연맹회 제출안건 심사특별위원회’를 새로 구성해 위원장 조완구, 위원에 장붕, 김병조, 고일청, 유경환 등 5인을 선출하고, 앞서 임의 작성한 ‘청원서’를 수정하도록 했다. 이때 수정된 청원서는 후술할 《한일관계 사료집》(전 4권)과 함께 국제연맹에 제출되었다. 이외에도 1919년 5월 23일 신한청년당 대표 여운형이 파리에 파견되는 것에 맞춰 목사 김병조, 안승원, 손정도, 장덕로, 조상섭, 배형식, 이원익 등과 장로 김시혁, 김승만, 조보근, 장붕 등 11인의 연서로 국제연맹회와 장로교 만국 연합 총회와 미주 각 교회 앞으로 ‘한국시사 진술서’를 작성해 발송했다.
비슷한 목적에서 김병조는 손정도와 함께 ‘한국기독교 대표들이 중국 기독교에 고하는 글’을 써서 한국의 독립운동에 대한 중국 기독교의 관심을 촉구하는 등 한국 독립의 필요성을 세계에 알리는 일에 주력했다.
1919년 6월 파리강화회의가 종결된 후 세계사의 주요 무대는 아시아 태평양 지역으로 이동했다. 이에 임시정부는 1920년을 ‘독립전쟁의 원년’으로 선포하고 열강에 대한 외교와 선전 활동을 강화했다. 임시의정원에서 물러난 김병조는 안창호의 요청으로 1920년 4월 국무원 산하 선전위원회 이사직을 맡아 선전업무를 담당했다. 당시 임정의 선전업무는 내무/외무부 관할 이원체계였으나, 안창호 주도로 한국, 중국, 구미 등 각지의 선전업무를 통합적으로 관장할 목적으로 임정 선전위원회를 조직해 안창호를 위원장에, 김병조를 이사에 선정했다.
선전위원회는 산하 선전대를 두어 국내 연통제, 교통국 통신망과 연결되었고, 대외적으로는 임정의 외교활동 기능도 담당했다. 김병조는 선전위원회 실무를 총괄하는 한편 3·1 독립운동 1주년에 맞춰 국내 만세시위 운동을 기획하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했다. 1921년 4월 신익희와 함께 한중 호조사를 창립해 한중 양국 간의 상호 협력과 친선 도모를 통해 공동으로 항일운동을 전개하는 기틀을 마련하기도 했다.
임시정부에서 김병조의 이름은 1923년 ‘국민대표회의’ 준비과정에서 마지막으로 등장했다. 1920년 이후 임시정부의 위상과 독립노선을 둘러싼 다양한 목소리들이 분출되면서 국민대표회의가 모색되었는데 김병조는 안창호 중심의 ‘임정 개조론’의 입장에서 상해 측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임시정부 역사편찬사업과 《한국 독립운동 사략(韓國 獨立運動 史略)》 저술
임시정부는 3·1 만세운동 이후 한국 독립운동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해 이를 통해 국제사회에 알리고 역사 전적(典籍)을 구비할 목적으로 5월 12일 제4회 의정원 회에서 안창호를 총재로 주임에 이광수, 간사에 김홍식, 위원에 김병조, 이원익, 장붕, 김한, 김두봉, 박현환, 김여제, 이영근 등의 임시사료편찬위원회를 구성했다.
1919년 7월 2일부터 시작된 사료 편찬 작업은 1919년 9월 6일 단행된 임시정부 제1차 개헌에 따른 정부 개조안이 반영되어 역사편찬사업도 국무원이 직접 운영하는 형태로 변경되었다. 그 결과 기존의 사료편찬위원회는 해산되었으나 김병조와 이원익 2인은 ‘국무원 사료 입조 사무 촉탁’으로 유임되어 김여제, 김석황, 김성봉 등 22명의 편찬 조역과 함께 9월 23일 《한일관계 사료집》 전 4권의 편찬, 간행을 완료했다.
이승하 목사<해방교회 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