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돌아오는 청년주일은 교회가 청년의 존재를 다시금 바라보게 만드는 귀한 시간이다. 이를 위해서 본교단은 제68회(1982년) 총회에서 청년들의 위상을 높이고 시대적 사명을 잘 감당할수 있도록 5월 셋째 주일을 청년주일로 지켜오고 있다.
세상은 청년을 ‘미래’라고 부른다. 청년은 지금 이 순간 교회의 ‘현재’이자 하나님의 사역을 이끄는 동역자다. 청년이 살아 있어야 교회가 살아 있고, 청년이 숨 쉬는 교회가 세상의 희망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 사회와 교회 안에서 청년의 자리는 날로 위축되고 있다. 청년 인구는 줄어들고, 청년의 삶은 고단하다. 취업과 결혼, 주거 문제는 청년을 짓누르는 대표적인 현실적 짐이다. 교회 안에서도 청년은 종종 외면되거나, 필요에 따라 동원되는 존재로 여겨지기도 한다. 예배당은 점점 중장년의 목소리로만 채워지고, 청년의 기도와 찬양의 소리는 희미해지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은 늘 시대의 전환점마다 청년을 부르셨다. 요셉은 청년 시절 애굽의 총리가 되었고, 다윗은 소년의 나이에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았다. 예레미야는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모르나이다”(렘 1:6)라며 자신을 작게 여겼지만, 하나님은 그를 민족의 선지자로 세우셨다. 예수님도 서른 즈음 공생애를 시작하셨고, 제자들 대부분은 젊은 청년들이었다. 초대교회를 이끈 바울의 동역자 디모데도 젊은 나이에 교회를 돌보는 사명을 감당했다. 이렇듯 하나님의 일에는 연령의 많고 적음보다 부르심에 대한 순종이 중요하다. 오늘도 교회는 청년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도록 돕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청년이 하나님의 꿈을 품고, 교회와 사회를 향해 거룩한 영향력을 펼칠 수 있도록 기도와 격려, 실질적 지원이 병행되어야 한다.
특히 청년사역은 단순한 프로그램이 아니라 존재에 대한 존중으로부터 시작된다. 청년을 위한 자리가 아니라, 청년이 중심이 되는 구조로 교회는 변화해야 한다. 그들이 마음껏 질문하고, 실패하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신앙 공동체가 될 때, 청년은 교회 안에서 성장하고 세상 속으로 파송될 수 있다.
이 과정에는 세대 간의 진심 어린 소통과 관심이 필요하다. 단지 가르치려는 태도가 아니라, 청년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공감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교회는 청년이 처한 현실을 외면하지 말고, 신앙 안에서 치열하게 고민할 수 있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 청년이 신앙을 삶 속에서 녹여낼 수 있도록,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질 수 있는 자유도 함께 주어야 한다. 교회의 역할은 청년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는 걸음을 지지하는 것이다.
청년주일을 맞아 오늘날 교회는 청년을 진심으로 환영하고 있는가?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그들의 걸음을 지지하고 있는가? 세상이 청년을 소비하려 할 때, 교회는 청년을 존중하고, 동행하고, 축복하는 장소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청년을 위한 진짜 예배이고, 진정한 다음세대를 위한 준비다.
청년의 시간은 곧 교회의 시간이다. 청년의 눈물이 교회의 기도가 되고, 청년의 꿈이 하나님의 나라로 연결될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 된 교회로 살아갈 수 있다. 청년이 살아야 교회가 살고, 교회가 살아야 이 땅에 소망이 있다. 이제 교회는 말이 아닌 행동으로 청년을 세워야 한다. 청년을 위한 사역이 아니라, 청년과 함께하는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오늘, 이 자리에서 이루어가야 한다. 그리고 그 시작은 바로 오늘, 청년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며 축복하는 작은 사랑의 실천에서 출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