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 전라도가 고향이지요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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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광주사회장으로 치러진 서서평 선교사 장례

최초의 광주사회장

한번은 유화례 선교사도 서서평 선교사를 따라서 나주 고막원이란 곳에 간 일이 있었다. 광주에서 나주 고막원까지 가는 길은 비포장 도로였기에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두 선교사는 어느 마을에서 전도하게 되었다. 이때 아주 볼품없는 16세 난 여자아이가 선교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선교사님, 저는 지금까지 학교 문턱도 가본 일이 없습니다. 공부를 하고 싶어도 돈이 없어서 공부를 할 수가 없습니다.”

유화례 선교사나 서서평 선교사는 그의 진실한 마음을 알고 그녀의 가정에 대해 자세하게 이야기를 들었다.

“저희 아버지는 술을 많이 마시고 다니다가 3년 전에 그만 다리에서 떨어져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니도 화병에 걸려서 죽고 말았습니다. 저희 오빠는 남의 집 머슴으로 살겠다면서 나가 버렸습니다.”

이러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유화례 선교사와 서서평 선교사는 자신들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래, 오늘 이곳에서 예배드리고 우리를 따라서 광주로 가자.”

소녀는 갑자기 얼굴색이 달라지면서 몇 번이고 두 선교사를 향해서 인사를 했다. 소녀는 저녁이 되자 동리 아이들에게 인사를 했다.

“얘들아, 나 오늘 저녁에 선교사를 따라서 광주로 공부하러 간다.”

불우했던 소녀는 좋은 기회를 만나게 된 것이었다. 이런 학생들이 이일성경학교에 모여 들었기에 유화례 선교사는 자연히 서서평 선교사가 하는 일에 대해서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유화례 선교사는 서서평 선교사보다 나이가 7년이나 아래였기에 늘 서서평 선교사를 언니라 부르면서 따랐다. 서서평 선교사의 사역이 유화례 선교사의 사역이었고, 유화례 선교사의 사역이 곧 서서평 선교사의 사역이기도 했다.

그러나 서서평 선교사는 더 이상 활동하지 못하고 있다가 1934년 2월 17일 과로로 그만 광주 제중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이 소식이 남장로교회 전 선교 구역에 알려지자 순천 알렉산더병원 녹스 의사와 광주 숭일학교 교장 김아각 선교사, 광주 제중병원 전직원들, 광주 수피아여학교 유화례 교장 등은 열심히 기도했다.

그러나 의사들의 수고와 동료 선교사들의 간절한 기도에도 불구하고 서서평 선교사는 1934년 5월 26일 새벽 4시에 운명했다. 이때 서서평 선교사는 유화례 선교사의 손목을 꼭 잡으면서 하늘나라에서 만나자고 약속하고, 같이 병실을 지키고 있던 이일성경학교 학생들에게 한 가지 부탁을 했다.

“찬송을 불러다오.”

고생과 수고가 다 지난 후/광명한 천국에 편히 쉴 때/주님을 모시고 나 살리니/영원히 빛나는 영광일세

영광일세 영광일세/내가 누릴 영광일세/은혜로 주 얼굴 뵈옵나니/지극한 영광 내 영광일세(찬 289장).

서서평 선교사는 한국에서 23년간의 사역을 마치고 한창 일할 54세의 나이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유화례 선교사는 그의 죽음을 지켜보면서 자신의 사역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참으로 훌륭한 여선지자였다. 나에게도 그 귀한 은사가 주어졌으면….’

몇 번이고 자신도 끝까지 성공할 수 있는 사역자의 자격을 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서서평 선교사의 사망은 각종 매스컴에 대대적으로 기사화되었고 일반 광주 시민들도 애도의 뜻을 표혔다. 더욱 충격을 받은 사람들은 광주 양림천에 생활 근거를 두고 있던 거지들이었다. 서서평 선교사는 항상 생활비를 받으면 그 길로 곧장 양림천으로 달려 가서 그들을 인솔해 목욕탕으로 안내를 하곤 했다. 그리고 깨끗하게 목욕을 시킨 후 옷가게로 안내했다. 남루하고 더러웠던 옷을 벗어 버리고 모두 새 옷으로 갈아 입혔다. 그리고 음식점으로 안내해 소고기도 배불리 먹였다. 그래서 양림천에 사는 이들은 서서평 선교사를 항상 어머니로 알고 그렇게 불렀다.

서서평 선교사가 사망한 지 12일 만에 고별예배를 드리는데, 그 넓은 오원기념각에 수많은 광주교회 교인들, 시민들, 광주 숭일학교, 수피아여학교 학생들이 모였으며, 제일 앞에 앉아 있던 양림천 거지들은 한결같이 엉엉 울고 있었다.

“어머니, 어머니. 우리는 어떻게 살아요?”

그런데 놀라운 것은, 천형이라고 알려진 음성 나환자들이 앞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었다. 그들 역시 한결같이 목놓아 울고 있었다.

“어머니, 어머니, 그렇게 가시면 어떻게 해요.”

이들 역시, 나병으로 고생하고 있었지만 서서평 선교사의 정성어린 간호는 잊을 수가 없었다. 그가 광주 제중병원에서 수간호사로 재직할 때 피부과로 찾아오는 나환자들을 정성껏 보살펴 주었으며, 혹시 여천 애양원에서 성형수술이라도 받으러 오면 정성껏 환자들을 보살펴 주었다.

그런데 원래 이 장례식은 교회장이나 선교회장으로 계획을 세웠으나 광주 시민들의 여론에 따라 사회장으로 실시하게 된 것이었다. 광주시가 생긴 이래 처음 있는 사회장이었다.

당시 사회장으로 하자고 주장한 사람들은 서서평 선교사와 관계를 맺고 있는 기독교의 지도자들이 아니라 비기독교 단체인 계유구락부였다. 이 계유구락부는 애국단체로서 민족운동의 중심인물이었던 최원준과 호남은행 전무 취제역 김신석 외 여러 회원들과 일본 도쿄 유학생들로서 재일 YMCA회관에서 2·8독립 선언에 적극 참여했던 김용환, 최경식, 최인식, 김범수, 정광호, 최한영 등이 모이던 단체였다. 또 이 장례식에는 일본인인 전남지사 야지마와 전남경찰부장 사토 등 많은 일본인들이 참여했다.

드디어 시간이 되자 서서평 선교사와 절친하게 지냈던 나환자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최흥종 목사가 등단해 고별예배를 인도했다. 최병준 목사가 등단해 서서평 선교사의 약력을 소개했다. 이어서 유화례 선교사가 교장으로 재직하고 있는 광주 수피아여학교 학생들의 합창이 있었는데 장내는 온통 눈물바다가 되었다. 그리고 수피아여학교의 교감 김필례의 조사는 더욱 회중들의 마음을 슬프게 만들었다.

맨 앞자리에 앉아 있던 거지들, 음성 나환자들, 이일성경학교 학생들 등 평생 은혜를 입고 살았던 많은 회중들의 두 눈에서는 한결같이 눈물이 흘렀다.

노라복 선교사의 축도가 끝나자, 곧바로 선교사들의 묘지인 양림동 선교 동산을 향해서 서서히 운구가 움직였다. 서서평 선교사의 일대기를 쓴 백춘성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운구는 백설 같은 소복 차림의 이일성경학교 학생들이 했고, 행렬 선두의 꽃다발은 서서평 교장이 가장 사랑했다는 학생 오복회가 들었다. 수백을 헤아리는 걸인과 나환자들이 ‘어머니, 어머니’ 하고 뒤를 따르는데 비행기 소리와도 같은 울부짖음에 눈물바다를 이루었다. 평양과 서울에서도 많이 왔고 여기에 참여한 조객들은 기독교인이든 비기독교인이든 간에 전부가 저고리 소매에 검은 완장을 둘렀으며 인파는 오원기념각에서 뒷동산 묘지까지 인산 인해를 이루었다. 광주 유사 이래 처음 갖는 사회장이었던 것이다.”

안영로 목사

· 90회 증경총회장

· 광주서남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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