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롱 한 짝이 안 들어가는 좁은 단칸방
결혼은 했지만 내가 아직 학생 신분이고 직장도 없었기 때문에 아내가 동생과 함께 피아노 학원을 운영해서 신혼살림을 꾸려 나갔다. 그 학원도 우리 어머니가 교회에서 결혼 자금으로 빌려 오신 150만 원에 아내의 할머니가 보태준 돈으로 차린 것이다.
우리는 피아노 학원 안에 딸린 조그만 방에 신혼 방을 차렸다. 장롱도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작아서 장롱 반 짝과 텔레비전만 간신히 넣었다. 그렇게 초라한 시작이었지만 나에게는 그곳이 천국과 같았다.
나는 행복했지만 아내에게는 많이 미안했다. 아내는 어려서부터 자가용을 타고 학교에 가고, 학교를 마치면 방송국에 가서 어린이 프로그램을 녹화할 만큼 유복하게 자랐다.
그런 아내가 월세 집에서 연탄을 때고 좁은 부엌에서 살림을 하고 있으니 내 마음이 좋을 리 없었다. 부엌이 좁아서 아내는 일어날 때마다 붙박이 찬장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쳤다. 석유곤로에 불을 붙이다가 머리와 눈썹을 태운 적도 많았다. 변변찮은 신혼살림을 꾸리면서도 나를 챙기느라 고생한 것을 생각하면 미안함과 고마움이 크다.
학생이긴 했지만 가장이었기에 나도 어떻게든 일자리를 구해 보려고 애썼다. 능력도 없었지만 학교 공부 때문에 시간이 맞지 않았다. 결국 결혼 후 1년 동안은 아내가 학원에서 버는 수입으로 생계를 이어 갔다. 그런데 학원의 학생 수가 줄어서 생활이 점점 어려워졌다.
그때 미군 부대에서 경비를 뽑는다는 소식을 들었다. 하루 3교대로 고된 일이었지만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생각에 지원했다. 1차, 2차 시험은 순조롭게 통과하고 미군 장교와 한국인 감독관 앞에서 면접까지 보게 되었다. 그런데 가끔은 주일에도 근무를 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 나는 나이가 지긋한 한국인 감독관에게 간절하게 부탁했다.
“다른 날에는 밤낮 가리지 않고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크리스천이라 주일 성수를 해야 하니 시간을 좀 조정해 주세요.”
“내가 장로입니다. 존경스럽네요. 젊은 사람이 그렇게 주일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참 대단합니다. 하지만 이곳은 주일에도 근무를 해야 하기 때문에 그 부탁은 들어줄 수가 없습니다.”
몇 백 대 일의 경쟁률을 뚫고 어렵게 여기까지 왔는데, 갑자기 그 말을 한 게 후회스러웠다. ‘식구들을 먹여 살려야 하는데, 어디서 이런 좋은 직장을 구하나?’ 사탄이 내 마음을 자꾸 흔들었다.
집에 돌아온 후에는 마음이 더 불안해져서 결국 장로라고 했던 그 감독관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다시 한번 생각해 줄 수 없겠습니까?” 그랬더니 아까는 나를 존경한다고 했던 그분이 “지금 장난하냐!”라며 화를 냈다. 내가 믿음을 지킬 때는 존경을 받았지만, 구차하게 기회를 빌자 비난만 받고 초라해진 것이다. 나는 나의 믿음 없음을 자책했다.
이은태 목사
뉴질랜드 선교센터 이사장
Auckland International Church 담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