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라이스 백성과 한국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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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돈(Sidon, 레바논 중남부 항구도시) 사람들이 자기들끼리 모여 자기네 방식대로 살 수 있는 장소를 찾기 위해 시돈을 떠나 이리저리 돌아 다녔다. 시돈 사람들이 드디어 찾으려던 곳이 나타났다. 그곳은 라이스(Laish)였다. 그들은 한동안 법과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행정도 필요 없을 만큼 평화롭게 살았다. 골치 아픈 일도 없었다. 마치 토머스 모어가 꿈꾸던 이상향(理想鄕) 유토피아(Utopia) 같았다.

“염려 없이 한가하고 평안하게 거했다.”(삿 18:7) 그 땅을 지키기 위해 어떤 법도 만들지 않았다. 혹시 있을지도 모를 외부의 침략이나 공격에 대한 대비책도 없었다. 무사 태평이었다. 그들은 조국(祖國) 시돈을 등지고 고립(孤立)해서 살았다. ‘상종(相從)하는 사람’도 없었다. 살고 있는 땅이 얼마나 비옥(肥沃)했는지 농사가 잘 되어 교역의 필요조차 없었다. 완전히 격리되어 살았다. 

그런데 얼마 후 문제가 생겼다. 단 지파(Dan Tribe) 사람들이 기업의 땅을 분배 받지 못해 거(居)할 곳을 찾아 나선 것이다. 마침내 라이스까지 오게 되었다. 다섯 명의 정탐꾼이 라이스 땅을 발견했다. 거기 사는 사람들의 생활상을 보고 지도부에 보고했다. 단 지파 600명의 남자들이 무기를 들고 라이스로 쳐들어갔다. 주민들을 죽이고 성읍을 빼앗았다. 단 지파 사람들의 정복은 아주 쉽게 이루어졌다.

지금 우리나라는 보수와 진보로 나누어 싸우느라 여념이 없다. 정치적으로 혼란스럽다. 서로 간에 대화도, 이해하려는 노력도 없다. 서로 미워하고 증오한다. 국익(國益)은 없고 당리당략(黨利黨略)이 최우선이다. 

나라가 이러한데 교회 지도자들은 과연 하나님의 공의(公義) 앞에 서 있는가? 사회 혼란과 갈등 조장에 교회의 책임은 없는가? 교회가 오히려 갈등을 부추기며 앞장서지는 않았는가? 

물고기가 물을 떠나 살 수 없듯이 교회는 세상을 떠나 존재할 수가 없다. 교회가 진정한 신앙 생활에서 떠나 있다. 혼란과 갈등의 시위대 속에 들어 있었던 그리스도인들에게 묻고 싶다. 하나님의 계명과 거룩한 뜻에 지배되는 시위 참여였는가? 그 투쟁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가? 성령님과 교통하고 있는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있는가? 아니면 이스라엘 사사(士師)시대 말기처럼 자기 소견대로 살아가고 있는가? 교회를 지도하는 목사님께서는 하나님과 성도들 앞에 부끄러움은 없는가? 불의(不義)한 권력 편에 서지는 않았는가? 

오늘날에는 적그리스도가 많이 나타난다. 적그리스도는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비슷한 모습으로 그리스도를 대신하려는 자들이다.

라이스에 살고 있던 시돈인들과 같은 그리스도인은 교회 안에 얼마든지 있다. 자기 방식대로 살면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관심이 없다. 본질적으로 이기적인 삶이다. 근시안적(近視眼的) 삶이다. 외적(外敵)의 공격에 전혀 대비책이 없다. 미국 트럼프 대통령 취임 후 우리 경제는 초긴장 상태다. 

우리는 어떤 기초 위에서 살고 있는가? 진리가 삶의 토대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라이스 사람들은 자기 도취에 빠진 삶이었다. 때문에 라이스 사람들은 전멸했다. 교회가 자기 도취에 빠지면 안된다. 이기적이고 경건과 거룩을 상실하고 있다. 교회가 보수와 진보, 이념의 덫에 갇히면 되겠는가? 교회가 나라를 위해 도덕적 지도력을 회복해야 한다. 세상으로부터 손가락질, 비난, 비판의 대상이 되지 말아야 한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백성 곁에서 고락(苦樂)을 함께하며 활동했다. 예레미야는 나라를 위해 눈물로 기도했다. 이사야, 하박국, 미가, 다니엘 등 선지자들은 생명의 위협을 받으면서도 피하지 않고 백성들을 위해 눈물로 권면하며 기도했다. 애국심은 나라에 대한 정(情)이다. 나라를 사랑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이다. 

모든 일을 자기의 이익으로만 가치를 계산하는 지도자는 안된다. 신앙인은 진정한 애국자가 되어야 한다. 교회는 세상을 향해 바른 길을 가르쳐 줘야 한다. 교회는 라이스 공동체가 되면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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