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민주 평화를 부르짖은 4.19 학생혁명 이듬해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육군 소장이 주동이 되어 일으킨 5.16 군사정변이 일어났다. 이 무렵 우리 대령급 출신 거물 간첩 김혁이 자수해 곳곳에 반공강연으로 반공을 국시로 삼은 혁명공약 제1번을 잘 살려 반공정신 교육에 크게 기여했다. 1961년 봄 대학 4학년때 연세대 강당에서 강연을 잘 들었다. 대학 졸업 후 입대한 해병진해기지사령부 정훈참모실 근무중에 해병 진해 장사병이 다 연병장에 모여 김혁 간첩의 반공강연을 두번째 들었다.
그는 휴전선을 넘어 남한에 침투경위부터 말을 시작했다. 간첩 안내자의 도움으로 휴전선을 넘어 동두천 모 여관에 들었다. 그런데 손님 하나가 밀린 여관비를 안내고 나가려다가 주인과 시비가 되어 시끄러웠다. 그 손님 여관비를 다 내주었다. 그 광경을 귀하게 본 육군 소령과 대화가 되어 밖에 나가 소주까지 마시고 들어왔다. 소령 숙소에서 자며 소령 다리 위에 자기 다리를 일부러 얹고 잠들었다고 했다. 대한민국 육군 소령과 한방에서 잔 자기를 간첩으로 누가 의심하겠느냐고 말했다. 버스로 서울로 와서 경부선 열차를 탔다고 했다. 열차가 만원이어서 어린이를 업은 여인이 서있으니까 어린이가 예쁘다고 수작을 부려 그 어린이를 안고 부부처럼 차칸 입구 벽에 기댄채 부산까지 잘 왔다고 했다. 부산 광복동에 세탁소를 차려 부산시민으로 위장했다고 했다. 세탁소를 해야 한밤 전기를 이용해 남한 정보수집 동태를 북한으로 쉽게 보낼 수 있다고 했다. 친절한 세탁소다 보니 손님이 많고 동네사람들과도 정이 들었다. 동네 반장으로 추대되었다. 동네 사람들과 어울려 어느날 술집에 갔다. 술이 취한 동네 사람들은 당시 민주당 정부를 마구 비판하며 내각제 정치의 윤보선 대통령, 장면 국무총리까지 이새끼 저새끼 거친 말로 비판하며 언행이 아주 자유로워 보였다. 북한 김일성 수상을 그 새끼라 말한다면 금방 잡혀가 감옥살이를 할 것이라 생각했다.
대한민국 언론의 자유 거주이전의 자유가 국민에게 나라의 높은 위정자까지 국민이 욕하고 비판하는 자유야말로 행복한 민주나라 자유라 생각했다. 김혁도 불안한 고정 간첩이 아니라 행복한 대한 나라 자유시민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자수하기로 결심하고 경남경찰국을 찾아가 문 손잡이를 잡는 순간 먹고 간 술이 확 깼다. 불안하게 귀가해 며칠 벼루다가 부산 중부경찰서에 자수하러 갔으나 용기가 나지 않아 귀가해 전화로 이름을 말하고 자수했다. 8개월의 무능한 민주당 장면 정부를 보내고 5.16 군사정부 때 김혁 간첩은 용단을 내려 귀순하고 반공을 국시로 내세운 군사혁명정부를 잘 도와 준 것이다.
2천년도 초에 월남한 황장엽 북한 인사는 남한에 간첩이 몇만 명 된다고 경고했다. 자유당 시절 김창용 특무대장이 나라를 파괴하려는 간첩을 많이 잡아냈다. 군내부에 있던 남로당 붉은 무리를 대대적으로 숙청했다. 김창룡(1916-1956)은 함남 영흥 출신으로 1940년 중국 장춘헌병교습소를 수료하고 25세에 일본 관동군 헌병이 되고 4년만에 헌병오장(하사관)이 되어 우리 독립군을 잡는 친일활동에 앞장섰다. 광복 후 북한에서 친일파로 사형언도까지 받았으니 남한으로 탈출에 성공해 1950년대에 육군장교로서 이승만 반공대통령 오른팔이었다. 부하 허태영 대령이 자신의 부하들에게 시켜 1956년 1월 30일 새벽 원효로 1가에서 암살당했다. 40세에 별세해 중장으로 추서되었다. 대전 현충원에 잠들어 있다. 1950년대 간첩검거 공로가 컸다. 박정희 대통령 군사정권 때 김혁 자수 간첩은 반공교육에 강연으로 크게 기여했다. 우리 정부는 언제나 자유대한을 적색화하려는 공산간첩을 철저히 잡아야 할 것이다.
오동춘 장로
<화성교회 원로, 문학박사,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