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에게서 모처럼 과분한 칭찬의 말을 들었습니다. 칭찬은 누가 해주든지 듣기 좋은 것이지만 특히 평생동반자가 해주면 기분이 썩 나쁘지 않습니다. 우리네 부부들은 대체로 서로 찬사를 주고받는데 인색한 편이지요. 때때로 고마운 마음이 왜 없겠습니까 만은 쑥스럽기도 하고 입밖으로 드러내지 않더라도 충분히 이심전심으로 뜻이 전달되리라 믿는 까닭이기도 합니다.
사건은 별게 아니고 고장난 청소기에 관련된 것입니다. 구입한지 5-6년 된 진공청소기가 얼마 전부터 성능이 떨어져 저속에서는 기능을 못하고 경고등에 빨간 불이 켜지도록 회전속도를 높여야 겨우 무엇을 빨아들이는 듯하더니 어느 날 그마저 뚝 그치고 먹통이 됐습니다. 세계 일류 기업 제품이라 오래 쓸 줄 알고 샀는데 수명이 너무 짧구나 한탄하며 아파트 관리실에 폐기 스티커를 구입하러 갔더니 그런 가전제품은 그냥 지정장소에 갖다 놔두면 된다고 했습니다. 그나마 다행으로 여기며 몸체와 송풍 호스와 흡입 막대로 분리해 수거장으로 들고 갔습니다.
작은 아파트에서 한 주에 두 번하는 바닥 먼지청소는 내 몫으로 되어 있어 여러 해를 사용하며 정들었던 물건이라 내버리기 전에 속이라도 한번 들여다 보려고 몸체에서 집진통을 떼어내니 스펀지 필터가 드러났고 여기 먼지가 잔뜩 들러붙어 두텁게 굳어져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내친김에 필터를 들어내서 털어보니 누적된 뭉치가 쉽게 떨어져 나오고 다시 제모습이 되었습니다. 혹시 이게 문제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어디 한번 시험이라도 해보자고 분해했던 기구를 다시 집어 들고 집으로 돌아와 재결합하고 긴장 속에 소켓에 꽂고 스위치를 올렸더니 놀랍게도 윙 소리를 내며 기계가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이리저리 움직여 보니 새것과 전혀 다를 바 없었습니다.
아내를 불러 이 경이로운 사실을 보고하니 “아니 어떻게?!”하는 탄성과 함께 남편의 능력에 대한 찬양이 솔직한 표현으로 울려 나왔습니다. 그 속에는 광고에서 본 무선 청소기를 새로 구입하려면 들 비용이 절약된 데 대한 안도감이 크게 들어 있는 것이지만 역시 남자는 다르구나 하는 인식과 인정이 배어 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런 남자 가장의 특별하고 대체불가능한 역할을 과시할 기회는 이번 말고도 종종 있었는데 예컨대 TV 리모컨을 아내가 잘못 눌러서 원하는 화면을 찾지 못하거나 또는 핸드백 장식 고리가 엉켜 풀리지 않아 내 도움을 필요로 하는 경우입니다. TV는 모든 전원 코드를 뽑았다가 3초 후에 다시 꽂으면 해결되는 비법을 터득했고 핸드백 등은 적당한 도구를 쓰면 손쉽게 고쳐지는데 어째 여성들은 이런데 서툰지, 남편의 권위를 다소나마 세울 수 있어서 좋은데 의아스럽기도 합니다.
진공청소기 사건으로부터 다른 생각이 번졌습니다. 내 주변에서 멀쩡한 물건들이 버려지고 있거나 이미 버려진 것들이 있겠구나 싶고 더 나아가 내 자신에 관해서도 스스로 더 할 수 있는 인생의 기능을 너무 일찍 문닫아 버린 게 있지나 않을까 하는 반성 같은 것이 일었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이것도 포기하고 저것도 포기하는 것을 아름다운 정리작업이라고 믿어왔는데, 살아있는 동안 내내 토기장이 손에 있는 진흙처럼 끝내 쓰일 데가 있음을 잊지 않아야겠지요?
김명식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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