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이슈] 한국교회 순교자들 (4) 김병조 목사 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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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 예배당 인수해 독자적인 예배당 마련

만주행, 선교와 독립운동의 새로운 길 모색

1919년 현재 상해교회 출석 교인 중 임시정부 요인으로는 담임목사 김병조를 포함해 송병조(목사, 치리 위원), 손정도(목사, 상의 위원), 정인과(목사, 상의 위원), 이원익(목사, 상의 위원), 조상섭(목사, 상의 위원), 현순(목사), 장붕(장로, 상의 위원), 여운형(전도인), 장덕수(전도인), 선우혁(집사), 한진교(집사), 서병호(집사), 김철(입교인) 등이 주요 직분을 맡고 있었다. 이외에도 이승만, 안창호, 김규식, 이동휘, 유동열, 신익희, 김구, 조소앙, 김순애 등도 상해교회에 출석하거나 직간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주민이 계속 증가하자 1920년 초 상해교회는 불조계 하비로 강녕리 교민단 사무소(佛祖界 霞飛路 康寧里 僑民團 事務所)로 처소를 옮겨 예배를 계속했다. 교회 조직이 확대되자 관련 사항을 결정하는 기구로 상의원을 두고 김인전, 정인과, 손정도, 이원익, 장붕, 조상섭 등으로 맡게 했다. 주일학교도 조직해 김태연이 교장을 맡았으며, 박영윤, 장필석, 김연실, 최명실, 박지명, 정상인, 정애경, 김순애 등이 교사로 활동했다.

1921년 1월 한인교회 담임목사를 재투표한 결과 김병조가 재선되었으며 교회 구역도 3지역으로 나누어 관리되었다. 이 무렵 세례교인 수만 130명이나 될 만큼 성장해 1921년 2월에 한인교회는 불조계(佛祖界) 서신교에 있던 중국인의 예배당을 인수해 독자 예배당을 마련하게 되었다. ‘삼일당’(三一堂)이란 이름을 가진 이 예배당은 원래 광제(光緖) 5년(1879) 미국 감리교회에서 중국 기독교인들을 위해 설립한 건물로 한인교회가 인수할 당시에는 교당이 아닌 중국인 소학교로 활용하고 있었다.

삼일당은 한인교회의 종교활동 외에도 임시정부와 관계된 각종 행사, 집회 장소로도 사용되었다. 대표적으로 1923년 1월 3일부터 6월 7일까지 개최된 국민대표회의 장소로도 이용되었다. 김병조 목사는 1919년 7월부터 1921년까지 한인교회 담임목회를 맡아 조직교회로서 성장시키는 데 헌신했다.

한편, 1919년 7월 초 임정 내무부 산하기관으로 결성된 대한적십자회는 상해 교민의 건강과 질병 예방, 치료 목적 외에도 독립전쟁 준비를 위한 ‘간호원 양성’의 목적을 띤 임시정부 중요 사업 가운데 하나였다.

국민대표회의는 국내는 물론 상해, 만주, 북경, 노령, 미주 등지에서 120여 개 단체 대표 120여 명이 모여 임시정부의 운명과 독립운동의 방향을 논의하는 중차대한 회의였다.

결과적으로 국민대표회의는 임정 개조와 ‘창조론’을 둘러싼 의견대립으로 전체 독립운동 세력을 하나로 묶는 일에 실패했고 이후 독립운동 세력의 대표로서 임정의 위상은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서북계 기독교 지식인으로 안창호를 도와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김병조는 대표회의가 와해되자 다른 독립운동가들이 그러했듯 또 다른 구국의 길을 찾아 만주로 떠났다. 1923년 6월 초의 일이었다.

만주(滿洲) 선교와 독립운동, 그리고 귀국(1924~1933)

만주는 지역이 광활하고 종교, 문화가 다양해서 개신교 선교 활동도 일찍부터 봉천(奉天), 홍경 중심의 남만 지역과 연길(延吉), 훈춘(薰春) 중심의 동만(간도) 지역, 길림(吉林), 신경, 하얼빈 중심의 북만 지역으로 나뉘어 이루어졌다. 상해를 떠난 김병조 목사의 만주행은 선교 목적 외에도 국민대표회의 이후 해외로 분산된 독립운동 세력들과 새로운 길을 모색하기 위한 출로였다.

이를 뒷받침해 주는 근거가 있는데, 만주에 머무는 동안 선교 활동 관계로는 자신의 이름을 ‘자’(字)인 ‘김유석’(金有錫)으로, 독립운동 관계로는 ‘김병조’를 계속 사용했다.

이승하 목사<해방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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