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22일 한국기독교연합회관에서 제64회 한국기독교학술원(이사장 이승택 장로, 원장 손인웅 목사) 공개 세미나가 ‘한국교회의 몽골 선교와 국제울란바타르대학교 30년’ 주제로 개최됐다. 이날 강연한 장로회신학대학교 명예교수 임희국 박사의 ‘한국 개신교의 몽골 선교 – 국제울란바타르대학교 30년’ 원고를 허락받아 게재한다. 임희국 박사는 스위스 바젤대학교를 졸업하고, 한국교회사학회 회장, 본 교단 총회 역사위원회 전문위원, 장로회신학대학교 역사신학 교수 등을 역임했다.
/편집자 주
▮ 시작하면서
몽골선교는 한국 개신교(장로교회)의 해외 선교에서 크게 주목받는 선교사역이다. 특별히 올해 2025년은 몽골 교육 선교의 모범으로 평가되는 국제울란바타르대학교 설립 30주년이다. 이 글은 한국 장로교 파송 몽골 선교사들이 이 대학을 설립하던 때의 역사적 환경과 설립 계기, 그리고 초창기 대학 역사를 중점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즉, 이 대학의 전신인 울란바타르한국어학교 설립(1993년), 이를 기반으로 설립된 울란바타르대학(1995년), 단과대학이 종합대학교로 발전하고 재단법인이 설립된 2002년까지를 서술하고자 한다. 그 이후, 이흥순 이사장을 중심으로 대학의 발전에 헌신한 ‘한국기독교학술원’의 선교사역은 추후의 연구로 남기고자 한다.
▮ 몽골 선교의 씨앗과 시작
1) ‘사랑의 쌀’ 나눔 운동
1989년 동독 공산당 정권이 몰락하고, 그 뒤를 이어 동유럽 공산주의 체제 국가들이 몰락했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적으로 동(東), 서(西) 양 진영이 대립하던 냉전(冷戰) 시대가 종식됨에 따라, 1924년 이후 소련의 위성국가였던 몽골은 소련 개혁⸱개방의 흐름에 따라 변혁의 길로 들어섰다. 1990년 몽골의 민주화는 단순한 정치적 체제 변화 이상의 의미를 가졌다. 오랜 공산주의 체제 아래 억눌렸던 종교 활동의 자유가 개방되면서, 한국교회는 발 빠르게 선교의 문을 열고 복음 전파에 나섰다.
1990년 전후로 몽골은 자연재해(눈사태 등)로 말미암은 식량 위기로 인해 전 국민이 생존 위기로 내몰렸고 또 가축도 대량 폐사했다. 이 위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몽골 정부가 이웃 여러 나라에 도움의 손을 내밀었다. 이때 몽골 정부와 한국교회 사이에 연결고리 역할을 한 사람이 몽골에 거주하는 최서면(한몽협회 회장)이었다. 그는 한국 개신교에서 ‘사랑의 쌀’ 나눔 업무를 총괄하는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이하 한기총, 사무총장 김경래)에게 쌀 지원을 요청했다.
1987년 이래로 한국은 내리 3년 동안 쌀생산이 엄청난 풍작을 이루면서 정부는 엄청나게 남아도는 쌀의 소비 대책으로 쌀막걸리, 쌀과자 등을 생산하기도 했다. 한국교회는 1989년 11월에 ‘사랑의쌀위원회’를 조직하고 ‘사랑의 쌀’ 나눔 운동을 시작하고 국내의 가난한 가정, 동남아시아 이웃 나라 등에 쌀로 구제 활동을 벌였다. 이때 들어온 요청에 따라 1991년부터 한국 개신교는 한기총을 통해 ‘사랑의 쌀’ 나눔 운동을 전개했다. 한기총은 약 5톤의 쌀을 몽골 적십자사에 보냈고, 4개월 후에 두 번째로 쌀 4만 포, 또 4개월 후에는 1억 원 상당의 쌀이 몽골에 도착했다. 그 후로 한국 개신교는 30년 동안 꾸준히 몽골에 ‘사랑의 쌀’을 나누었다. 20세기 말 세계 대변혁의 상황에서 한국 개신교의 몽골선교 씨앗이 몽골 현장에 뿌려지게 되었고, ‘곳간에서 인심난다’는 속담처럼 몽골선교의 지평이 넓어져 갔다.
2) 선교 불모지 몽골
1990년대 초반에 미선교 국가 몽골은 국가 주도 계획경제에서 자본주의 시장경제로 전환하면서, 급작스러운 체제 전환에 적응하지 못하는 자들이 생기며 사회 불안이 심각해졌다. 국가가 소유하고 경영해오던 경제체제가 갑자기 개인이 재산을 사유(私有)하고 경영하는 체제로 전환되자, 아직도 여전히 지난 옛 시대의 생각과 이념, 일상생활, 사회 체제에 젖어 있는 자들이었다. 체제 전환에 적응하지 못하여 정신적 공황을 겪는 자들이 적지 않았고, 또 온갖 범죄(절도⸱폭행⸱강간⸱살인 등)가 기승을 부렸다.
당시 몽골에 대한 한국 정부의 관심은 경제와 지하자원 분야로 집중되었고, 두 나라가 공유하는 역사적 배경과 문화적 교류에 관한 연구는 거의 없었고 또 노력조차 미미했다.
반면 ‘사랑의 쌀’ 나눔을 통해 한국 개신교가 사회적으로 좋은 반향을 일으킨 이때, 1991년 소망교회 단기 방문단으로 몽골에 방문한 안교성 목사와 윤순재 목사는 몽골의 언어⸱종교⸱역사⸱사회를 공부했고, 몽골의 기독교 역사도 공부했으며, 몽골선교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전략을 구상했다.
윤순재는 몽골이 “미전도 종족 국가이고, 현대 몽골어로 번역된 성경이 없고, 교회도 없으며, 교인도 없는 상태”라고 진단하고, “사회 전반에 걸쳐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인 선입견과 편견이 팽배해 있어, 선교사 비자를 받고 몽골에 입국하고, 목회자 신분으로 그 나라에서 교회 개척 선교를 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제3의 선교전략, 곧 창의적으로 몽골에 접근하는 선교전략을 구상했다. 그것은 간접 선교에 대한 착상이었다. 즉, 성경 몽골어 번역, 몽골 국민의 호기심을 끄는 외국어 교사, 여행사 설립, 외국(한국) 기업이나 상사의 주재원, 의사 간호사 등 전문인 기술자 선교, 학교 설립을 통한 교육 선교, 출판 사업(문화) 선교, 청소년 선교, 유목민 순회 전도 등등의 가능성을 상정했다. 이는 140년 전 조선 땅에서 일어난 외국인 선교사들의 선교 정책과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었다.
3) 몽골선교 개척자 두 가정 – ‘둘씩 짝지어’
1991년 11월, 본 교단 총회 선교부에 지원해 선교사로 선발된 안교성, 명미리 부부와 윤순재, 이계심 부부는 홍콩에서 열린 제1회 몽골선교컨퍼런스에 참석해서 몽골선교에 관한 다양한 정보를 접하며 현장 선교사들을 만났다. 이 컨퍼런스에서 몽골선교를 위한 몇 가지 중요한 점이 결정되는데, 첫째로, 몽골에서 각국 선교 단체와 선교사들과 선교 기관이 상호 협력하여 연합 사역을 하는 것. 둘째로, 울란바타르에 선교사 자녀를 위한 국제 학교를 설립하는 것. 셋째로, 더 많은 아시아 출신 선교사들이 몽골에서 사역하도록 하는 것. 넷째로, 성경 번역 및 배포에 적극 참여하는 것 등이었다.
선교 불모지에서는 (예수님의 선교전략에 따라) ‘둘씩 짝지어’ 선교 현장에서 팀 사역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결론을 낸 안교성 부부와 윤순재 부부 선교사들은 몽골선교 개척자가 되었다. 이들은 지난 70년 동안 그 어느 나라의 선교사도 몽골에 입국하지 못했기에, 지금까지 서양 교회 중심으로 진행된 선교 방식과 전혀 다른 새로운 방식의 개척 선교를 개시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개척 선교는 이 점에서 무(無)에서 유(有)를 창출하는 ‘창의적(creative) 선교’를 뜻했다.
사실 몽골의 기독교는 역사가 아주 깊다. 몽골은 먼 옛날 메소포타미아에서 발원한 동방교회(시리아교회)를 통해 복음을 접하고 받아들인 기독교의 깊은 역사를 품고 있다. 주후 1007년에 동방교회 선교사들이 몽골초원의 케레이트족(Keraits)을 만나 칸과 백성들을 기독교로 개종시켰다고 한다. 선교사들이 계속해서 오이라트족(Oirats), 나이만족(Naimans) 등 여러 종족을 기독교로 개종시켰다. 그 이후 몽골제국에서는 기독교, 불교, 무속신앙 등의 여러 종교가 평화적으로 공존했다.
칭기스칸이 제정한 종교정책에 따라 몽골의 역대 칸들은 종교가 몽골의 지배권을 위협하지 않는 한 여러 종교의 상호 공존을 용인했다. 13세기에는, 1289년 쿠빌라이 칸이 기독교를 전담하는 정부 기구(승복사)를 설치할 정도로, 기독교 교회가 번성했다. 그러나 14세기 중반 칭기스 칸 후예들의 내분에 따른 국가 분열, 중앙아시아를 강타한 흑사병의 창궐, 그리고 중국 대륙을 지배하게 된 명나라가 몽골 세력을 추방하면서 외래 종교를 배척하는 정책을 펼치자, 이때부터 동방교회가 서서히 자취를 감추었다. 19세기에는 제임스 길모어 선교사 등 유럽과 북미 개신교가 몽골선교에 착수했다.
그러나 1924년 이후 소련의 위성국가였던 몽골에서는 기독교 선교가 금지되었다. 소련의 그늘에서 벗어난 후에도 기독교 포교의 자유는 자국(몽골)의 국민에게만 허용되었다. 몽골은 외국인이 직접 기독교를 포교하는 행위를 허락하지 않았고, 또 자국에 입국한 외국인의 포교 활동도 금지했다. 그 이유는 기독교가 몽골의 전통문화에 기반한 국민의 정신적 결속을 해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4) 몽골선교 시도
안교성·명미리 선교사와 윤순재·이계심 선교사는 몽골국립종합대학 몽골어 연수 과정에 입학하여 몽골어를 배우고 익히는 한편, 지극히 제한된 선교 정황 속에서 미리 계획했던 대로 협력과 연합의 에큐메니칼 선교, 몽골 토착 주민을 존중하는 선교, 그리고 간접 선교를 서서히 시도했다.
안교성 선교사는 몽골 토착 교회 지도자들과 협력하면서 성경을 몽골어로 번역하기 시작했다. 몽골은 1990년까지 현대 몽골인이 사용하는 키릴문자(Cyrillic Letters or Alphabet)로 번역된 성경이 없었다. 성경 번역은 (지난날 한국에서 성경이 한글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경험했듯이) 몽골 개신교 교파와 교단들의 연합과 일치에 근거가 되었다. 그 무엇보다도 성경 번역은 몽골에서 기독교 용어 통일의 기초이고 신학 개념 정립의 기반이었다. 또한 안교성 선교사는 가조르트 지역에 서지연 수양관, 비오 콤비나트 지역에 비오 이벨수양관을 조성하여 몽골 교회의 기반을 닦기 위해 헌신했다.
윤순재 선교사는 교육 선교에 착수했는데, 그는 몽골 청소년들의 언어와 행동을 관찰했다. 그는 감성이 풍부하고 호기심이 많은 몽골 청소년들이 나라 밖 해외 여러 나라의 문물과 문화에 대해 (국가의 강력한 통제에도 불구하고) 동경심이 크다는 점을 인지했다. 그래서 그는 이들에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생의 새로운 꿈(vision)을 꿀 수 있는 그 무엇을 심어주고자 했다.
5) 몽골 교육 선교 시작, 울란바타르한국어학교(Ulaanbaatar Korean Language Institute)-합작학원(1993-1995년)
(1) 1990년대 초반의 몽골
1991년부터 몽골이 개혁⸱개방 노선을 확대했지만, 새로운 교육 정책은 종합적인 준비가 미미한 상태에서 출범했다. 경제 정책 또한 시장경제로 전환했으나, 실물 경제가 워낙 어려워 궁핍한 나머지 국민에게 공급되는 생활필수품 배급이 원활하지 못했다. 몽골을 도우려는 국제 비정부기구(NGO) 단체와 기관들이 이 나라에 와서 구호사업을 펼치기 시작했지만, 몽골에서는 지난날 공산당 전체주의 체제가 몸에 밴 관습이 아직도 여전히 국민 대다수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서양 개신교와 아시아 개신교가 파송한 선교사들이 유학생이나 전문 기술자로 몽골에 입국해 간접 선교를 시작했다. 이들의 사역에 새로운 세계 곧 외국 선진 문화와 사상에 대한 호기심과 동경심으로 가득한 젊은 세대들이 관심을 보였다. 진취적 생각을 가진 젊은 세대의 눈에는 외국 선교사들이 마치 성탄절 선물을 썰매에 가득 싣고 온 산타 할아버지처럼 보였던 것이다. 이에 대해 몽골의 전통과 문화를 지키려는 강한 의지로 무장하고 있던 정부는 선교사들의 활동을 유심히 관찰하며 세심하게 통제했다. 정부는 외국인 선교사에게 복음 전파와 교회 설립 등을 허용하지 않았다.
2) 교육 선교의 시작 – 울란바타르한국어학교
윤순재 선교사의 교육 선교는 몽골 청소년들과 ‘만남의 공간’을 창출하면서 출발했다. 언어 학원을 설립해 이 공간에서 몽골 청소년들과 만나고 그들과 더불어 삶을 얘기하면서 복음을 전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1993년 10월 그는 몽골 국립의과대학교 강의실을 빌려 울란바타르한국어학교를 시작했다.
한국어학교의 학생모집이 처음부터 뜨거운 성황을 이루었다. 모집 정원이 30명이었는데, 70명이 지원했다. 학교 강의실을 2개 빌렸고, 한 강의실에 학생 35명이 수업받았다. 소규모 도서관도 갖추었다.
그런데 몽골 국회가 1993년 11월 19일 ‘국가와 종교단체와의 관계법’을 제정했고, 다음 해 4월부터 그 법이 발효되었다. 내몽(內蒙) 외국 선교사들에게 매우 우려되는 법이었다. 선교사들은, 이 법을 제정한 목적이 몽골 사회에서 선교사의 영향력을 견제하고 또 선교사의 영향력을 통제하고 차단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선교사들은 이제까지 보다 좀 더 신중하게 간접 선교에 착수해야 했다.
1994년 2월에 한국어학교는 몽골 최초로 졸업학점제(credit system)를 도입했다. 몽골 최초로 장학제도도 마련했다. 또 4월에 몽골 최초의 ‘한국-몽골 소사전’을 발간했다.
울란바타르한국어학교에 대한 좋은 소문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한국어 원어민 교사가 많고 또 교사들이 잘 가르친다는 입소문이었다. 11월 18일 이 학교에 뜻밖의 반가운 손님이 찾아왔다. 김정순 몽골대사가 학교를 방문한 것이었다. 학교의 이모저모를 살피며 둘러본 김 대사는 윤순재 선교사에게 학교의 현재 운영과 장래 비전에 관하여 물으며 길게 대화를 나누었다. 그 이후, 김 대사가 몽골 정부 교육부에 이 학교를 위한 추천서를 제출했다.
1995년에도 여전히 입학정원은 30명이었는데, 무려 360명이 지원했다. 12:1의 경쟁률이었다.
(다음 편에 계속)
임희국 박사(장로회신학대학교 명예교수, 교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