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재활 교육에서 배운 것 (1)

Google+ LinkedIn Katalk +

음식 만드는 방법부터 길을 찾아나서는 방법 등 교육 내용은 다양했다. 이들이 필요로 하는 생활 전반에 관련 교과 과정을 이수하는 데는 약 2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나를 지도할 교수는 미시간 대학원을 졸업한 미혼 여자로서 시카고 제1장로교회의 집사직을 맡고 있는 분이었다. 나는 입학한 뒤 일주일 동안 이 재활원에서 알아야 할 적응 훈련을 받았다. 말하자면 입학과 동시에 받는 오리엔테이션 프로그램이었다. 하루는 교수가 나를 교수실로 직접 불렀다.

이 학교의 규칙상 일주일 동안 무료로 재워 주고 먹여 주며 적응훈련을 시키는데, 시험을 치러야만 그 다음 공부를 할 수 있다고 했다. 동양인으로서는 내가 처음 입학한 학생이어서 어떠한 시험 문제를 내야 할지 매우 걱정이 된다면서 “어떤 시험 문제를 내면 좋겠느냐?”고 나에게 되물었다.

나는 빌립보 4장 13절에 있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는 말씀을 떠올리며 어떤 문제를 받더라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물론 자신감은 있었다.

그 교수는 한참 동안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면서 “정말이냐?”고 몇 번씩이나 확인했다. 나 역시 그렇다고 대답했다. 점심 식사 후 정해진 장소에서 만날 것을 약속했다. 올 때 두꺼운 외투와 장갑을 반드시 착용하라고 했다.

별난 입학 시험

나는 약속 장소에 시간을 맞추어 나갔다. 교수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성직자이며 기독교인입니다. 자신이 한 말에는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 학교에서 치르는 시험에 합격하면 이 학교에 머물면서 재활교육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이번 시험에 실격하면 한국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어떻게 하겠습니까?”

나는 약속대로 시험을 치르겠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 교수님은 나에게 굵직한 지팡이 하나를 주면서 이 지팡이를 짚고 앞장서라고 했다. 나는 그 지팡이를 짚고 앞장섰고 그 교수는 등 뒤에서 시험을 시작했다.

나는 지팡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평소에 지팡이를 짚지 않고 다녔기에 지팡이를 잡는 순간부터 창피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공부하러 온 지금 무엇인들 마다할 수 있겠는가.

교수는 오른쪽, 왼쪽, 동쪽 하면서 15분 동안 걸어갔다. 그곳은 바로 버스 정류장이었다. 얼마를 기다리자 버스가 왔다. 우리는 그 버스를 타고 약 40분 간 어디론가 갔다. 40분 동안 그 교수님은 이런 저런 일들을 설명했다.

드디어 우리는 어느 정류장에서 내렸다. 그녀는 나를 인도 위에 세워 놓고 냉정하게 말하기를 성직자는 자기가 한 말에 책임을 져야 한다면서 “내가 당신을 이곳에 두고 갈 터이니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우리 학교를 찾아온다면 합격으로 인정하고 앞으로 일이 년 간 공부를 계속할 수 있지만, 만일 못 찾아오면 당신 나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다”고 하면서 가 버렸다.

갑자기 당한 일이라 한참 동안 암담했고 어떤 절망감을 느꼈다. 이곳 지리도 모르고 버스 타는 요령도 모르는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뾰족한 수가 없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 그 순간 나에게 지혜를 주셨다. “주여, 내 생애에 있어서 또 하나의 시험이 나를 기다리고 있사오니 지혜의 방법을 일러주소서”라고 간곡하게 기도했을 때 “네 손에 든 지팡이를 가지고 차도에 내려가서 흔들라”는 응답이 왔다.

즉시 나는 차도로 내려갔고 지팡이를 마구 흔들어 댔다. 내 앞으로는 차들이 많이 지나가고 있어서 매우 위험한 줄 알았으나 성령님의 인도하심대로 실행에 옮긴 것이니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분명히 나를 도울 사람이 있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지나가던 차들이 서행하면서 “너 미쳤구나” 하면서 지나쳐 버렸다. 수많은 차들이 지나갔는데, 그중 차를 세워 놓고 나에게 다가와서 친절하게 묻는 사람이 있었다.

“내가 당신을 어떻게 도와 드릴까요?” 하면서 나의 대답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참으로 반가운 일이었다. 나는 시각장애인재활원의 주소를 대면서 “그곳으로 나를 데려다 주시면 대단히 고맙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분은 내 요청을 기꺼이 승낙하고 나를 자기 차에 태우고 가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가톨릭 신부님이었던 그분은 따뜻하고 친절하게 나를 그곳 시각장애인 재활원까지 안내해 주고 잘해 보라면서 헤어졌다.

학교에 도착한 나는 현관에 가서 지도교수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녀는 나보다 약 한 시간 후에야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왜냐하면 나는 자가용으로 왔고 교수는 버스를 타고 왔기 때문이다.

김선태 목사

<실로암안과병원장>

공유하기

Comments are clo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