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교수는 나를 보자마자 너무 놀랐는지 껑충껑충 뛰면서 “원더풀”을 연발했다. “도대체 어떻게 일찍 왔느냐”고 물었다. 나는 성령님께서 나에게 사람을 보내 주셔서 이렇게 무사하게 이곳까지 올 수 있었다고 대답했다. 물론 나는 시험에 합격했다. 그 교수는 다음날 아침 첫 강의 시간에 나를 학생들에게 소개했다.
“김선태 목사님은 한국에서 온 성직자로서 훌륭하게 시험에 합격했습니다. 이분은 정말 우리 학생들 중에 천재적인 학생입니다. 그러므로 이분에게서 재활 훈련에 필요한 것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나는 우레 같은 박수갈채 속에서 몸둘 바를 몰랐다. 그 날부터 나는 모든 교수들과 학생들의 인기와 사랑을 한몸에 받았고 또한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천재라고 하니까 어떤 학생은 나의 머리도 만져보고 귀도 만져 보았다. 또 어떤 여성은 내가 미혼이라면 나와 결혼을 하겠다고 농담까지 할 정도였다.
나는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는 정규수업을 받았고 금요일 오후부터 주일까지는 친구 강형길 목사와 함께 이 선교 사역을 위한 일들을 하며 지냈다. 나는 재미한인교회를 통해 과분한 대접도 받았고 사례도 받았던 터라 그곳 교수들과 학생들을 한국 식당으로 초대해 융숭한 파티를 열어 주면서 한국인 사회의 역사와 형편을 소개하고 한국인의 관습과 음악도 소개했다.
일반적으로 재활원의 학생들이 이수하는 교과 과정 및 실습은 적어도 1~2년 걸려야 마칠 수 있는데 나는 5개월 만에 모든 과정을 A+로 통과했다.
이곳 재활원의 교육 과정을 통해 감동받은 나는 한국에 돌아가면 반드시 시각장애인을 위한 재활원을 개원해야겠다고 굳게 결심했다. 이 같은 결심은 드디어 실행에 옮겨서 1997년 실로암 안과병원 옆에 실로암 ‘빛의 집’을 4층으로 건립하기에 이르렀다.
나의 관심은 시각장애인 심리학
나는 일리노이주 정부가 운영하는 시각장애인재활원의 생생한 교육 과정들을 통해 배운 학과목도 중요했지만 그들의 정신과 사회적 관심이 얼마나 중요한가 깨닫게 되었다. 내가 관심을 가진 분야는 시각장애인의 심리학 분야였다.
시각장애인으로서 여러 가지 심리적 불안감이 정신적 질환이나 자포자기로 빠져들게 되면 인격이 파괴되고 나아가 걷잡을 수 없는 정신 착란 같은 질환을 일으키게 된다. 또한 자칫 잘못하면 지나치게 자책감을 가지거나 자기 학대와 함께 자폐증 증세를 일으켜 사람들을 기피하거나 사회로부터 완전히 도피하려는 증세가 발생하게 된다. 이와 같은 일이 큰 문제이다.
그러므로 시각장애인의 건강한 정신적 활동을 위한 적절한 교육과정이 잘 준비되어 있어서 어떠한 상황에 처한다 해도 결코 낙심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삶의 스타일을 찾아나갈 수 있도록 돕는 사회보장제도나 훈련 센터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특별히 시각장애인의 약점을 보완할 수 있기 위해서는 직업 훈련이 필요하다. 재활훈련원에서 실시하는 직업 훈련 프로그램이 다양해야 할 뿐 아니라 학생들의 적성에 맞는 직업을 지도하는 훌륭한 교수들의 지도와 직장에서 일할 수 있는 폭넓은 기회가 열려져 있어야 한다.
나와 함께 교육을 받는 학생들의 성격이 밝고 명랑한 것을 보면서 우리 한국 사회도 이들처럼 국가로부터 정당한 교육의 기회, 특히 재활 훈련의 기회를 속히 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모든 국민들이 보장받을 수 있는 복지 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장애인들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계몽되어야 함을 절실하게 느꼈다.
시각장애인선교가 서서히 확대해 나아갈 수 있도록 도움을 준 친구들에게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앞으로 해야 할 구체적인 봉사 활동들을 실천해 나아가기 위해 다양한 프로그램에 대한 캠페인을 개발해 시행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재일 교단의 초청을 받다
시각장애인선교 사역을 시작하면서 지금까지 달려간 교회와 사회기관들을 일일이 열거하자면 지면이 모자랄 정도이다. 또한 개인적으로 만난 교계와 사회의 인사들 역시 일일이 거론하자면 한이 없다. 그리고 집회의 종류도 매우 다양하다.
그러나 그와 같은 교회나 기관 혹은 개인들을 포함한 일체의 집회와 만남의 주목적은 시각장애인선교 사역을 돕는 후원금 마련을 위한 노력이었다. 1973년 내가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산하 전도부 소속 시각장애인선교부 총무를 맡으면서 지난 25년 간 발로 뛴 활동 범위는 실로 넒고도 험한 길이었다.
우선 국내만 하더라도 전국 교회를 대상으로 집회와 간증 사역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때마다 성령께서 인도하시고 모든 성도들이 합심해 시각장애인선교를 적극적으로 도와주셔서 하나님께 감사드릴 뿐이다.
김선태 목사
<실로암안과병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