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이슈] 한국교회 순교자들 (4) 김병조 목사 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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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한인 이주민 공동체를 대상으로 한 목회, 선교 활동과 넓고 거친 만주에서 다양한 무장운동 단체들과의 활동을 이원화하고자 한 의도였다.

1923년 6월 김병조가 도착한 남만주 봉천성(奉天城) 지안(輯安)은 일찍부터 평북노회 관할 선교지로, 1918년에는 김병조가 속한 의산노회 소속이었으며, 다시 1921년 4월 21일 남만노회가 조직되면서 통합되었다. 지리적으로 이곳은 압록강을 경계로 김병조의 고향과도 지척에 마주했을 뿐 아니라 이주민 대부분도 서북 출신들이었다. 노회 기록에 의하면, 1923년 5월 23일 남만노회가 통화현 진두현 교회에서 열려 상해에 있는 김유석을 화전자 지방 목사로 청빙했는데 이가 바로 김병조였다.

이어 8월 21일에 열린 제6회 남만노회는 김윤석 목사의 화전자교회 시무를 확정했다. 김병조는 집안현 화전자, 패왕조 교회를 맡아 목회했고 삼성소학교, 삼성중학교, 광명학교 등에서 교육 활동과 <한족 신문> 발행 등 언론 활동도 이어갔다. 이 시기에 교과서 《대동역사》, 《독립혈사》(獨立血史, 1924) 등을 저술했으나 안타깝게도 두 권의 역사서는 현재 전해지지 못했다.

그리고 김병조 이름이 ‘불령 단체 관계’(佛領 團體 關係) 건으로 일본 관동청 경무국 보고 문건들에 등장하는 것도 이 무렵이었다. 김병조는 1924년 2월과 4월 ‘대한 통의부 조직 명단’(大韓 統義府 組織 名單)에 이름이 올라 있으며, 이후 통의부에서 탈퇴한 뒤 재조직된 임시정부 직속의 ‘육군 주만 참의부’(1924. 6)에서도 ‘진동 도독부 고문관’(鎭東 都督府 顧問官)으로, 1925년 9월 조직 개편에서는 이웅해, 김창준과 함께 독립운동계 원로로 ‘참의부 고문’에 촉탁되었다.

1920년대 중반 이후 해외 독립운동은 항일민족전선을 형성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형성되어 임정계의 홍진, 안창호를 중심으로 3부(정의, 신민, 참의) 통합과 민족유일당 운동이 주창되었다. 1927년 4월 1일 동북성 길림에서 안창호는 재만 한인 약 500명이 운집한 대동 공사(大同 公司)에서 민족 대동단결을 역설했다. 김병조가 남만주의 집안을 떠나 동북 방면 흑룡강성으로 옮겨 간 시기도 이때였다.

김병조가 러시아와 국경이 맞닿은 동북 3성 길림의 목단강 팔면통 밀산(密山)으로 거주를 옮긴 것인데, 여기에는 안창호의 대동단결 연설과 ‘농민 호조사’를 통한 이상촌 건설 운동과 관련이 있다. 농민 호조사는 안창호와 김동삼, 이탁, 오동진, 손정도, 배형식 등이 만주의 값싼 토지를 매수해 한인 농민들의 협동 호조를 통해 한인사회를 안정적인 이상촌으로 건설하고자 조직한 농민운동 단체였다.

이 일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동북 방면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었다. 팔면통 밀산은 북로군정서 관할로 약 100호의 한인들이 거주했고 모두 기독교 신자들이었다. 이곳에서 김병조는 팔면통교회 목회와 신일 소학교를 세워 교육사업에 전념했다.

그러나 1920년대 후반 들어 일제의 만주 진출이 본격화되자 만주의 행정당국은 배일정책의 일환으로 재만 한인 구축 정책을 실행했다. 한인들이 일제의 ‘만몽정책’(滿蒙政策)에 이용될 가능성 때문인데, 한인들의 자율적인 교육권을 침해하거나 토지소유권, 상조권, 소작권, 거주권 등을 박탈하는 등 직접적인 피해가 커졌다. 중국 당국의 한인 탄압으로 교회와 학교 중심의 신앙공동체를 이룬 한인 기독교인들의 경우 토지, 식량, 가축 등을 빼앗기거나 상해를 입는 일이 허다했다.

김병조 목사도 1928년 팔면통교회를 시무할 당시 마적에게 붙잡혀 곤욕을 치른 일이 있었다. 1932년 3월에는 교회 성도 임주호, 한영실 부부의 결혼식 주례 후 귀가 중에 마적 떼 160여 명에 납치되어 23일 550원을 주고 풀려났을 만큼 목회와 생활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이승하 목사<해방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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