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목회, 나의 일생] 조선시대 갓 이야기 그리고 한국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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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인트헬레나섬에 유배되어 살던 나폴레옹은 가끔 당시 한국의 갓을 쓰고 멋을 내곤 했다. 그는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대패하고 실각한 후 유배지에서 조선 선비의 그림 한 장을 보고 갓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조선의 갓에 가장 먼저 깊은 관심을 가진 유럽인이 나폴레옹이었다.

삼국시대 이전에도 갓이 있었다고 전해지지만, 가장 오래된 역사적 흔적은 고구려 벽화에 등장하는 양반의 그림이다. 세계 어디에도 없는 갓 문화는 조선시대 계급사회를 통해 크게 발전했다. 갓은 계급에 따라 모양, 크기, 재료, 장식이 달랐으며 성공한 양반의 자랑이자 자존심이었다.

중인들이 쓰는 갓, 평민들이 쓰는 패랭이라는 갓이 따로 있었지만, 노비는 갓을 쓸 수 없었고 특히 조선시대 가장 낮은 천민 계급인 백정은 갓을 쓸 수 없었다. 백정들은 평범한 복장도 갖출 수 없었고 이름이 없어 호적조차 가질 수 없었다. 박씨 성을 가진 한 백정이 아들만큼은 자신처럼 살지 않기를 바라며 무어 선교사 학당에 보냈다. 그는 아들을 교육시켰지만, 정작 자신은 기독교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던 중 박씨가 중병에 걸려 고통 중에 있을 때 무어 선교사와 당시 제중원 원장이자 왕실 주치의였던 에비슨을 만나 놀라운 치료를 경험하게 된다. 그는 곧 예수를 믿고 무어가 사역하던 곤당골교회의 교인이 되어 세례를 받았다.

이 일로 박씨는 선교사들로부터 ‘박성춘’이라는 이름을 받게 되었고, 곤당골교회에 140명의 백정을 전도해 등록시키고 곤당골교회 첫 번째 장로로 피택되었다. 또한 무어와 에비슨의 노력으로 백정 신분이 철폐되고 백정도 이름과 호적을 가지며 갓을 쓸 수 있게 되었다. 미국에 노예 해방이 있었다면 한국에는 백정 해방이 있었다.

백정 출신들이 모두 갓을 쓰고 주일마다 교회로 몰려드는 장면은 기독교 역사의 큰 명장면이자 진풍경이었다. 박성춘 장로의 아들 박서양은 에비슨의 안내로 세브란스 의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인 최초의 서양 병원 의사가 되어 교수가 되었으며, 그의 두 아들도 의사가 되었고 박서양은 독립운동가로도 크게 활동했다.

이처럼 자랑스러웠던 갓은 조선의 몰락과 함께 쇠퇴하게 된다. 1895년 단발령이 내려지며 상투를 자르고 머리를 자르는 일이 일어나고 서양식 모자가 등장하게 된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그 멋진 갓은 대부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조선의 갓 이야기를 통해 나는 오늘의 한국 교회를 떠올리게 된다. 내가 어릴 적 경남 거창군 남상면 전체에서 교인이라곤 청림동 주민 20여 명이 전부였다. 성경책을 손에 들고 교회에 다닐 수 없어 비료 포대에 성경을 돌돌 말아 숨기고 다녔다. 그러던 시절을 지나 기독교가 산업화를 이끌며 크게 부흥하면서 “나는 교회 다닌다”는 말을 자랑스럽게 할 수 있는 시대가 열렸다. 기독교인은 정직과 신용의 대명사가 되었고, 자랑스러운 이름이었다.

그러나 최근 탈종교화와 함께 교회는 사회의 신뢰를 잃었다. SNS에서는 ‘개독교’라는 말로 조롱당하고, 학교와 사회에서 기독교인은 소수자가 되었다. 기독교는 위선, 배타, 편협의 대명사처럼 여겨지고 청년 이하 다음 세대의 그리스도인 비율은 10% 이하로 떨어졌다. 교회 다니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 되어가고 있다고 한다.

가장 가슴 아픈 장면은 젊은이들이 교회에서 목사 주례로 결혼하는 것을 꺼려하기 시작한 것이다. 선교사들의 피로 세워진 기독교 학교들이 교회를 자랑스럽게 여기지 않고 교단을 떠나고 있다. 시일야방성대곡이 절로 떠오른다. 어쩌다 우리 교회가 조선의 갓처럼 몰락의 표상이 되어가고 있단 말인가?

주여, 한국교회는 무너질 수 없습니다. 다시 일어나게 하소서.

류영모 목사

<한소망교회•제 106회 총회장•제 5회 한교총 대표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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