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통합)는 1992년 제77회 총회에서 ‘순교자기념주일’을 제정하고, 제108회 총회부터 그 명칭을 ‘순교·순직자기념주일’로 변경해 매년 6월 둘째주일에 지키고 있다. 그 목적은 기본적으로 총회가 공적으로 추서한 순교자와 순직자를 기념하기 위함이다.
기념의 행위는 과거 사건에 대한 합의된 의미를 고정하고 강화하므로 현재에 그것을 기념하는 공동체 구성원들을 그 의미규정에 동원하는 행위이며, 나아가 그 공동체의 현재적 필요와 주장을 정당화하고 합법화하는 과정이다. 예를 들어 폴리캅(Polycarp)의 순교기록을 읽는 행위는 독자로 하여금 그의 순교를 기억하고 기념하게 할 뿐 아니라 동시에 그 독자들을 미래에 폴리캅과 같은 순교자가 되도록 훈련시키고 동원하는 것이다.
‘총회 순직자 제도시행 규정’은 복음 전파를 위해 어떠한 위험이 예측되는 상황에서도 복음전파의 사명을 포기하지 않은 자를 기억하고 기념하며 교회의 모델로 삼고자 하는 것이 제도의 목적임을 분명히 밝힌다. ‘총회순교자추서규정’ 역시 순교자를 추서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온 교회에 공포해 순교신앙을 기념하고 계승하도록 하므로, 과거의 순교 사건을 과거의 역사적 사건으로 화석화시키지 않고, 현재화 해 ‘오늘’의 신앙 증언으로 이어가고자 하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한다. 이렇듯 순교·순직자 추서 제도와 담론의 주목적은 바로 ‘기념’과 ‘교육’이다. 따라서 순교·순직의 현장은 이런 기념과 교육의 장으로서 그 의의를 지니고 있다. 문제는 어떻게 기념하며, 무엇을 교육하는가이다.
순직의 경우는 조금 다르지만, 사실상 순교담론에는 늘 가해자가 존재하기 때문에 순교교육은 자칫 가해자에 대한 성토 혹은 보복의 결단을 일으키는 교육으로 진행되기도 한다. 예를 들면, 16세기 베스트셀러이며 기독교 고전 중 고전으로 알려진 존 폭스의 <순교자 열전>의 내용 속에는 가톨릭의 박해를 받아 사망한 프로테스탄트 순교자들의 죽음을 고문, 조롱, 투옥, 화형, 겁탈 등 폭력에 의한 잔혹한 죽음으로 자극적으로 묘사해 가해자의 야만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런 장면들의 묘사는 가해자의 폭력성과 야만성을 고발하는 것이며, 독자는 가해자에 대한 분노와 복수를 키우게 되는 양상으로 교육된다. 하지만 순교신학은 그리스도를 본받아 자기를 희생해 타인을 살리는 사랑, 자신을 가해하는 자를 향한 용서의 선포, 그리고 이러한 사랑과 용서를 통한 화해를 실현한 그리스도를 본받음이다. 끔찍하고 폭력적인 박해를 신앙의 힘으로 인내하며 죽음을 맞은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통해 신앙을 고양시키는 것이 순교이야기의 기록 목적이다. 실제로 교회 역사에서 순교자들의 사망일은 바로 그 순교자를 기념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통치 속에서 새로이 태어나는 ‘생일’ 곧 영적 생일로 여겨졌으며 순교자의 무덤은 ‘기도의 장소’가 되었다. 순직자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선교사명을 수행하다 불의의 사고로 생명을 읽은 교인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복음을 생명을 다해 전파하고 지키고자 하는 가운데 박해로, 불의의사고로 생명을 잃은 자를 우리는 순교자, 순직자로 추서해 기념하고 있다.
순교·순직의 현장이 순교자, 순직자들을 기념하는 것과 동시에 현장을 사적지로 지정하므로 교육되어야 할 내용은 바로 갈등과 반목의 현장에서 분노와 복수를 넘어 그리스도를 본받는 신앙의 결단과 실천, 곧 사랑과 용서와 화해의 실천이 되어야 한다.
한국교회는 때때로 이러한 순교·순직 기념현장에서 이데올로기 교육 혹은 집단주의를 곤고하기 위한 교육을 실행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순교자와 순직자 기념의 진정한 의미는 믿음의 선배를 따라 그리스도를 본받는 사랑과 용서와 화해의 실현을 위한 기도와 교육의 현장이 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순교·순직자기념주일은 우리의 신앙을 점검하고 우리의 신앙이 폭력과 야만성이 난무한 시대와 현장에서 타자를 향한 희생적 사랑의 훈련이며 용서 선포의 현장이며 화해의 초석을 놓는 시간과 현장이 되어야만 한다.
최상도 목사
<호남신학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