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 전라도가 고향이지요 (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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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씨앗 뿌린 배유지 · 노라복 선교사 헌신과 유산

그가 교장으로 부임하자 고등과 4년제가 신설되었다. 그는 학생들을 중심으로 전도대를 조직하고 매년 여름방학이 되면 농어촌전도에 힘을 기울였다. 특히 여름성경학교는 노라복 선교사의 장기처럼 여겨졌다. 그래서 교장을 사임하고 일반 선교사로 사역할 때 화순군에 원리교회(1958), 광양군 도사리교회(1920), 화순군 확천리교회(1921), 광양군 원당리교회(1921)를 그 지역 교인들의 힘을 빌려 설립하기도 했다.

한편 노라복 선교사는 광주선교부에서 운영하는 달성경학교 및 대 사경회 교사로서 지도자 양성에 힘을 쏟았으며, 이러한 결과로 광주선교부에 소속된 교회들이 활기를 띠었다. 그의 강의에 감동한 선교부에서는 그를 평양 장로회신학교에서도 강의하도록 추천해 평양을 왕래하면서 강의를 했다.

그의 활기찬 선교 사역은 농촌교회에까지 미쳐 그가 가는 곳마다 노라복 선교사를 찿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데 그는 광주에서 3.1운동이 일어나던 해에 끔찍한 교통사고를 당했다. 1919년 3월 26일 노라복 선교사, 배유지 선교사 부부, 목포선교부 크레인(Paul S. Crane) 선교사 등 네 명이 배유지 선교사의 새 차로 서울을 떠나 광주로 향하고 있었는데 수원을 지나 병점역에 도착할 무렵, 건널목을 건너다가 기차와 충돌했다. 이 사고로 뒷좌석에 탔던 배유지 선교사 부인과 크레인 선교사는 사망하고 노라복 선교사는 눈을 다쳤으며, 배유지 선교사는 창밖으로 튕겨져 나갔다.

운전을 맡았던 배유지 선교사는 죄수로 감옥에 일시 수감되었으나 재판하는 과정에서 무죄로 판명되어 곧 석방되었다. 그러나 이 일로 노라복 선교사도 하마터면 사망할 뻔했는데 그 일이 너무 감사해서 더 많은 일을 하게 되었고, 농촌 교회를 순회하면서 자신이 겪었던 사고를 간증했다.

“여러분, 제 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그 기적 속에서 저를 살려 주셨습니다.”

역시 이러한 간증을 할 수 있는 시간도 일제는 빼앗아 갔으며, 그후 강제 출국 명령을 받고 다른 선교사들과 함께 광주를 떠났다.

그후 해방과 함께 광주에 온 노라복 선교사는 1947년 광주에 도착해 광주고등성경학교를 개설하고 농어촌 청소년들을 모아 교육시켰다. 교장으로 취임한 노라복 선교사는 부인과 함께 광주고등성경학교에서 각각 교사로 활동하다가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그 길로 귀국해 고향에서 1959년 79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비록 그는 광주를 떠났지만 그가 설립하고 전력을 쏟았던 광주고등성경학교는 그후 계속 발전했으며 후에 통합 측과 합동 측으로 나누어지면서 역시 고등성경학교도 둘로 나누어졌다. 그러나 이 두 학교가 지금은 광주에서 호남신학대학교, 광신대학교로 발전했고 지금도 이 학교를 통해 목회자가 양성되고 있다.

양림동 동산에 우뚝 솟은 배유지 선교사의  묘비

경부선 철도 병점역에서의 사건은 배유지 선교사에게는 이루 말할 수 없는 큰 충격이었다. 이미 그는 1901년 로티 위더스푼의 사망으로 큰 충격을 받은 경험이 있었는데, 더욱이 자신의 운전 부주의로 두 번째 부인을 잃게 되었으니 말이다. 여기에 살인죄목으로 감옥에 수감되기까지 했으니 그의 마음은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었다.

무죄로 석방되었을 때 그는 두 번째 부인 사이에서 얻은 두 자녀를 데리고 잠시 귀국했다. 그는 태평양을 횡단하는 배 위에서 남몰래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그리워했던 고향에 발을 딛기가 어려웠다. 이미 첫 번째 부인에게서 낳은 두 자녀는 무럭무럭 잘 자라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친지들의 기도와 하나님의 위로의 말씀에 힘을 얻고 1921년 9월 15일 잠시 안식년으로 나와 있던 줄리아 디저트 선교사와 결혼을 하고 함께 선교지인 광주 땅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마음을 정돈하고 선교 현장을 뛰어다니면서 선교 사역에 임했다.

세 번째 부인인 줄리아 디저트(Jullia Dysart, 한국명 배쥬니아, 1872~1952) 선교사는 미국 성죠셉에서 출생했으며 키르키시빌사범학교를 졸업하고 1907년 9월에 군산선교부에 부임했다. 교사 경력에 따라서 멜본딘여학교에서 교사로 사역을 하다가 광주 이일성경학교가 설립될 때 교사로 광주에 부임했다. 이때 배유지 선교사와 광주선교부에서 만나 협력을 하게 되었고 이것이 인연이 되어 세 번째 부인이 되었다.

배유지 선교사는 쥴리아 디저트 선교사를 맞아 더 열심히 선교사역에 임했지만 하나님께서는 1925년 9월 28일 아깝게도 그를 불러가셨다. 갑작스러운 사망 소식이 모든 선교사들에게는 믿기지 않았다. 그런데 그가 평소에 유언을 준비했기에 전남·북노회가 모일 때 유언장이 공개되었다.

“내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서 내 죄로 인해 흘리신 보혈을 의지하오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 부활할 것을 믿사옵고, 내 육신과 몸을 사랑하는 하나님께 부탁하옵나이다. 아멘. 내 사랑하는 자에게 부탁하옵는 것은 나의 믿고 사랑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저희들도 온전히 믿고, 또 내가 순복한 하나님의 말에 저희들도 순복하기를 원합니다. 특별히 조선 형제 자매들에게 알게 하옵는 것은 부족한 저로 하여금 이 조선에 나와서 주님의 복음을 전하게 된 것을 감사하오며, 꼭 믿고 바라는 것은 천당에서 저희를 많이 만나볼 때에 빌립보서 4장 1절 말씀과 같이 그 중 더러는 내 즐거움도 되고 나의 면류관이 된다는 말씀을 기억할 때에 여러 형제들도 즐거움으로 서로 만나기를 원하나이다. 주후 1923년 11월 14일 배유지”

참으로 배유지 선교사는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그는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산 하나님의 종이었기에 그가 뿌린 복음의 씨앗은 오늘날 목포, 광주, 그리고 그의 발걸음이 닿았던 곳곳마다 복음의 열매로 맺혀 있다.

그가 유언서를 남기고 얼마 후 하나님은 그를 불러 우리의 곁에서 영원히 떠나게 하셨다.

세 번째 부인은 일제의 강제 출국 명령을 받고 1940년에 귀국했지만 1941년 6월 1일에 곧 은퇴하고 고향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1952년 80세의 나이로 남편이 있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갔다.

배유지 선교사의 사망 소식을 들었던 전남·북도에 흩어져 있던 선교사들은 물론 주한 모든 교파 선교사들이 그를 애도하기 위해 광주 양림촌으로 모였다. 광주가 생긴 이래 가장 많은 외국인들이 모여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더욱이 그의 장례식은 광주숭일학교와 수피아여학교 학생들로 구성된 성가대의 은은한 조가 속에서 엄숙하게 거행되었다. 그리고 그의 시신은 늘 선교사들이 올라다니면서 기도했던 양림동 동산 산봉우리, 먼저 갔던 동료들의 무덤 곁에 안장되었다. 그의 유언대로 그는 주님의 재림 때의 부활을 믿고 영원히 그 곳에서 쉬게 되었다.

지금도 여름철만 되면 수많은 새들이 그의 묘비를 바라보면서 노래하는 것을 보면 정말로 그는 하나님의 사람이었구나 하고 생각하게 된다.

안영로 목사

· 90회 증경총회장

· 광주서남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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