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과 지혜] 이자익 목사 거창선교 100주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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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익(李自益) 목사는 한국 교회사에서 누구보다 중요한 인물이지만 그의 업적과 가치는 아직 세상에 충분히 알려지지 않았고, 알려진 자료에도 오류가 많아 재조명이 필요하다. 가장 많이 회자(膾炙)되는 이야기는 그가 종이었던 시절 상전을 제치고 먼저 금산교회 장로가 되었다는 일화인데, 이것도 사실과 다르다. 그가 장로로 임직을 받을 때는 마부 생활을 마치고 부잣집 딸과 결혼해 가정을 꾸리고 장사해 돈을 번 이후였다. 비록 그가 몇 년간 조덕삼 지주의 집에서 마부로 일한 것은 사실이지만, 당시 마부는 종이 아니라 월급을 받는 조건으로 고용된 일종의 직업이었다. 

이자익 목사는 김제 두정리교회(현 금산교회)와 구봉리교회(현 원평교회)를 목회하면서 전북노회장을 역임한 후, 1924년 제13회 장로교 총회장에 선출되어 전국적으로 그 이름과 인품과 능력을 알리게 되었다. 그리고 1925년 호주 장로교 선교회의 요청으로 거창 지부 선교사 대리로 파송되어 11년 동안 31개 이상의 교회를 순회 목회했다. 올해(2025년)는 이자익 목사 거창선교 100주년이 되지만, 아무도 이를 아는 사람이 없고 기억하지도 않는다. 

이자익 목사는 인생의 가장 황금기인 46세(1925년)에 거창 지부 선교를 시작했다. 그는 총회장을 지냈고 대접받을 위치에 있었지만, 오히려 농촌과 산간벽지 31개 이상의 교회를 순회 목회하며 고난의 자리를 자처했다. 당시 호주선교회는 부산, 마산, 통영, 진주, 거창의 5개 지부를 관할하고 있었는데, 거창 지부가 가장 열악했다. 거창 지부는 지금의 거창, 함양, 합천군 지역을 일컫는다. 

이자익 목사 전후에 호주 선교사들이 거창을 맡았지만 모두 언어와 건강상의 문제로 제대로 선교 활동을 하지 못했다. 거창 지부는 이자익 목사 시대에 교회의 기틀이 잡히고 부흥하던 전성기였다. 그리고 이 모든 결과는 그의 노력과 헌신과 지도자로서의 역량 때문에 가능했다. 이자익 목사는 이 밖에도 제22~25회 경남노회 노회장(1927~1928년)을 지냈고, 부노회장도 두 차례나 역임했다(26~27, 30~31회기). 그리고 이 시기에 이자익 목사는 분열 직전에 있던 마산 문창교회와 진해 웅천교회의 극심한 분규를 원만히 해결하는 탁월한 지도력을 보였다.

거창지역 선교 역사에서 이자익 목사의 목회자적 권위와 사역의 비중이 오늘날 터무니 없이 과소평가 되어있는 것은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문성모 목사

<전 서울장신대 총장•한국찬송가개발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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