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가 로마 제국과 유착(癒着), 세속화 되어가자 많은 신앙인들이 초대 교회에서 보았던 완전한 헌신의 삶을 살기 위해 수도원 생활을 택했다. 자기 부인(否認)의 한 방도로 영혼과 육체를 훈련하는 신앙 운동이 시작되었다. 동방과 서방의 수도원주의는 차이가 있다. 여기서는 서방의 수도원주의에 대해서만 살펴 보기로 한다.
수도원 운동을 시작한 분은 AD 480년 경 이탈리아 출신 베네딕트(Banedict)였다. 로마 귀족 계급 출신으로 그가 20세 가량 되었을 때 은자(隱者)가 되기를 결심하고 동굴 속에서 살기 시작했다. 극단적인 금욕(禁慾) 생활이었다. 얼마 후 그의 명성이 높아지자 주위에 제자들이 모여 들었다. 수도(修道) 생활을 하는 데 넓은 장소가 필요하게 되자 공동체를 수용할 수도원을 한적(閑寂)한 지역 몬테 카시노(Monte Cassino)로 이전했다. 이것이 수도원의 시작이다.
베네딕트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 동(東)고트 왕이 방문할 정도였다. 그러나 베네딕트는 동고트 왕을 폭군으로 간주하고 있었기에 독설(毒舌)과 저주를 서슴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베네딕트는 공동체의 질서와 수도를 위해 <규율집>(Rule)을 만들었다. 엄격했지만 정도에 지나치지 않는 질서와 규범으로 지혜로운 수도원 생활을 추구했다.
베네딕트는 수도원 생활에서 두 가지를 중요시했다. 영속성(Permanence)과 순종(Obedience)이었다. 이는 수도사들이 자기 마음대로 수도원을 옮기지 못하게 하고 처음 가입한 수도원에서 종신(終身)하도록 한 것이다. 이것은 사회가 혼란스러워도 수도원 제도를 안정화시키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규율 자체에 대한 복종과 마음 속에서 우러나는 순종을 강조했다. 명령 이행이 불가능하다면 그 이유를 수도원장에게 설명하도록 했다. 잘못을 저지른 수도사에게는 은밀하게 권면을 했다. 권면을 받고도 고쳐지지 않으면 공개적으로 문책(問責)했다. 그 다음은 파문(破門, Excommunication)이다. 파문을 당하면 다른 수사(修士)들과 접촉이 금지되며 공동 식사에도 참여할 수 없었다. 그래도 회개하는 빛이 없으면 채찍으로 체벌(體罰)을 가했다. 체벌도 효력이 없으면 공동체에서 추방했다. 그러나 그 후에라도 회개하면 다시 받아 들였다.
<규율집>에는 모든 수도사(修道士)들이 순번제로 노동을 하도록 했다. 환자, 노인, 어린이는 특별한 조치를 받았다. 수도사들 중에 특별한 대우를 받는 사람은 없었다. 수도사는 가난을 통해 공동체와 유대(紐帶)가 강화되고 모든 이들이 평등하게 가난하므로 서로 의존하며 살아갔다.
베네딕트는 수도원 생활의 핵심을 기도에 두고 기도 시간이 배정되었다. 경건회는 예배당에서 행해졌으며 낮에 일곱 번, 저녁에 한 번, 모두 여덟 번 예배를 드렸다. 하루의 첫 기도회는 새벽에 행해졌다. 예배의 대부분은 시편 낭송과 성경 강독(講讀)이었다. 대부분의 수도사들은 시편 전체와 성경의 여러 구절을 암기할 수 있을 정도였다.
이 모든 일과를 ‘성무일과'(聖務日課, Divine Office)라고 불렀다. 학문 연구도 수도사들의 주요 일과가 되었다. 그 외의 성경과 기타 서적들의 필사(筆寫)를 했다. 자연스럽게 수도원은 학문의 중심지가 되었다. 여로(旅路)에 지친 나그네들을 위한 여관(旅館) 역할도 했다. 경제적으로도 큰 영향을 끼쳤다. 수도사들의 노동에 의해 토지를 경작해 유럽의 농경지 면적이 확대되었다. 수도원은 지성과 영적 훈련, 육체 노동이 종합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일반 대중으로부터 격리된 채 생활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복음 전파에 도움이 되었는가? 하는 논란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후 많은 교황과 추기경들이 수도원에서 배출되었다. 현대의 신학 교육의 선구였던 셈이다. 중세 교회의 부패를 막는 역할도 수행했다. 세월이 지나자 수도원도 부패해 갔다. 수도원의 규율은 서방(西方) 교회에 큰 영향을 끼쳤다. 현대 대형 교회, 목회자, 그리스도인들은 수도원(修道院) 정신을 배울 필요가 있지 않겠는가?
김용관 장로
<광주신안교회·한국장로문인협회 자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