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국제 망신당하던 그 날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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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일본에 있는 재일 한국인 교회를 여러 번 방문했던 것은 우리의 복음화 사역에 필요한 헌금과 실로암 안과병원에 필요한 장비를 구입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첫 번째 방문은 일본 내에서 실시하고 있는 시각장애자들을 위한 사회보장제도나 재활 훈련이나 사회적 인지 등에 관한 정보를 얻기 위함이었다.

나는 재일 교단에서 초청 받고 어려운 과정을 거쳐서 일본에 갈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 당시는 여권을 받고 일본 입국 사증 받기가 매우 까다로웠던 시절이었다. 여권 신청은 외국에서 공식적인 초청장을 우선적으로 받아야만 했다. 하루 종일 소양 교육을 통해 보안교육을 받은 후 반드시 신원조회를 거쳐야만 했다.

그 기간만 해도 족히 3개월이 걸렸다. 여권 발급을 받은 후 일본 입국 사증을 받자면 일본 법무성까지 조회를 받아야만 했으니 거의 반 년은 걸린 셈이다

김포공항에서 일어난 해프닝

1976년 3월 19일. 나는 그렇게도 힘들고 어려운 과정을 통해 여권과 입국 사증까지 받고 드디어 일본으로 떠나게 되었다. 나를 초청해 준 재일 교단 대표자들과 일본 시각장애인전도협의회 임원들이 하네다 공항으로 나를 맞이하러 나오기로 약속했다.

내 생애에 처음으로 국제 여행길에 오른다는 감회와 비행기에 오른다는 감격으로 마음이 설레었다.

김포공항에서 출국에 필요한 모든 절차를 밟고 최종적으로 출입국관리소를 통과하려던 참이었다. 나는 여권을 내밀었다. 그 자리에 앉아 있는 담당 직원은 여권을 보더니 내가 시각장애인임을 확인도 하지 않은 채 병역 미필자라 해 출국을 허락하지 않았다. 분명히 여권 뒷면에는 ‘시각장애자’라는 표시가 있었고 주민등록증에도 ‘장애자’라는 증명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허락을 하지 않았다.

담당자와 옥신각신하는 동안 뒤에서 줄을 선 여행자들이 빨리 자리를 비켜 달라고 아우성이었다. 담당자는 내게 업무 방해죄로 고발하겠다고 엄포까지 놓았다.

하는 수 없이 나는 법무부 산하 출입국 관리 사무소의 책임자를 찾아가 사정 이야기를 했다. 내가 만일 오늘 비행기를 놓치면 국제적으로 망신을 당할 수밖에 없으니 출국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간절하게 호소했다. 책임자는 서류를 검토한 후에 출국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무엇 때문에 허락을 안 했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면서 담당자에게 다시 가 보라는 것이었다.

나는 젊은 담당자를 다시 찾아갔으나 역시 거부당했다. 그러는 동안 비행기는 떠나 버리고 말았다. 참으로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나는 처음으로 국제적 신사가 되려는 찰나에 국제적 망신부터 당해야만 하는 어이없는 상황에 처했다. 이렇게 무지한 사람들이 지금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문화인의 수치가 아닌가.

일본 시각장애인전도협의회 임원들이 공항에서 나를 늦게까지 기다리다 그냥 헤어지고 말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비행기는 이미 떠났으니 어떻게 해야만 병역 미필증을 받을 수 있는지 난감했다. 나와 아내는 허탈감에 빠진 채 집으로 돌아왔다. 여기저기 수소문해 보았더니 법무부 직원의 행동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안과병원에 가서 진단서를 받아 병무청에 가서 병역 미필증을 신청했다. 그곳에서도 서류를 확인하면서 왜 출국을 허락하지 않았는지 이해가 안 된다고 하면서 병역 미필증을 전해 주었다. 나는 무사히 출국 허가를 받고 1976년 3월 20일 처음으로 비행기에 올라타고 일본으로 향했다.

나는 일본 시각장애인전도협의회 임원들을 만나 백 배 사죄를 해야만 했다. 얼마나 부끄럽고 송구스러웠던지 몸둘 바를 몰랐다. 하지만 선교사역에 대한 영적 방해라고 여기면서 이를 극복할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하네다 공항에 마중 나온 일본 시각장애인전도협회 임원들의 따뜻한 환영을 받고 그들의 주선으로 여러 시각장애인기관들을 방문할 수 있었다.

우선 공항부터 시내에 이르기까지 길 복판에는 점자로 길 안내가 되어 있었다. 기차표를 사는 곳이나 화장실 가는 길 등 어느 곳으로든지 시각장애인들이 안심하고 오갈 수 있도록 길 표지가 분명한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많은 시각장애인들이 그 복잡한 거리를 마음껏 다닐 수 있고 기차표나 전차표도 손쉽게 구입해서 자기가 목적하는 곳으로 아무런 어려움 없이 가고 있었다.

우리나라 시각장애인들의 복지 형편과 비교해 볼 때 나는 하늘과 땅 차이만큼이나 큰 간격을 느꼈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개선과 시설이 국가 시책으로 반영되어야만 하는가 상상해 보았다.

김선태 목사

<실로암안과병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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