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 전라도가 고향이지요 (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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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역 선교사 추방 사건과 목포에서의 선교 시작

순천역에서 일어난 사건

일본 경찰이 외국인 선교사들을 추방하고 있을 무렵, 순천역에서도 이와 같은 사건이 발생했다. 목포, 광주, 순천 선교부에서 사역했던 변요한 선교사는 일본 경찰의 추방 명령을 받고 부인과 함께 순천역에서 출발하려는 기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 그와 함께 오래도록 순천 각 지역에서 선교에 힘을 기울였던 목회자들이 그와의 이별을 아쉬워하며 마지막 그의 얼굴이라도 보고 헤어져야 한다면서 순천중앙교회 박용희 목사를 비롯해서 나덕환, 김형모, 선재련, 김형재, 오석주, 김정복, 양용근, 강병담, 안덕윤, 김순배 목사, 선춘근, 박창규, 임원석 전도사 등이 1940년 11월 15일 순천역에 모였다.

순천은 다른 지방에 비해 비교적 기온이 따뜻한 지역이었다. 추운 겨울이지만 꽃이 피기도 해 사람들이 살기 좋은 고장이라고 했다. 아직도 차가운 날씨가 되려면 보름이나 더 있어야 하는데 난데없이 세찬 북풍이 불어닥쳤다.

변요한 선교사 부부는 혹시라도 감기에 걸릴까봐 두툼한 코트를 걸치고 나왔으나 별 효과가 없었다. 그러나 한국인 목회자들도 그날 감옥으로 직행할 것을 예감했는지 모두 두터운 옷을 걸치고 왔다. 순천역 구내로 갑자기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여기에 모였던 사람들은 평소에 변요한 선교사로부터 은혜를 입었던 사람들로서 언제 만날지 몰라 그의 가는 길에 하나님께 기도라도 하겠다는 순수한 마음을 갖고 모여든 사람들이었다.

드디어 기차는 서서히 다가서고 있었다. 짐을 챙긴 변요한 선교사는 37년간 사역했던 전라도 산천과 그리고 함께 생사고락을 같이했던 한국인 목회자를 뒤로 하고 서서히 기차 안으로 들어갔다. 정시에 기차는 기적소리를 울리며 순천역을 빠져 나가기 시작했다.

기차가 순천역을 막 벗어나자 점퍼 차림의 건장한 청년들이 들이닥치면서 전송 나왔던 목회자들을 연행해 갔다.

“여보시오, 아무 이유도 없이 순천경찰서로 가자는 이유가 뭡니까?”

“목사 선생님, 가 보시면 압니다.”

이때는 일본 경찰이 한반도 어디서든지 큰 소리를 치면서 살던 시대였으므로 목사의 말을 우습게 여겼다.

“서장님, 여기 열다섯 명의 목사와 전도사들을 연행해 왔습니다.”

당돌하게 생긴 한국인 출신 고등계 형사가 동족을 연행하면서 무슨 전과라도 올린 듯이 상사에게 보고하고는 곧바로 경찰서 유치장으로 이들을 수감시켰다.

이때 순천중앙교회 박용희 목사는 죄목이라도 알고 가야 하지 않겠느냐고 간수에게 항의했다.

“목사 선생님, 당신네들은 미국 스파이 선교사와 내통한 죄입니다.”

아무 영문도 모르고 구속되었던 열다섯 명의 목회자들은 이때 비로소 죄목을 알고 순천경찰서 구치감을 거쳐서 광주형무소에 수감되기까지 모진 시련과 역경을 견뎌야 하는 고통을 안게 되었다. 훗날 이 사건을 가리켜서 ‘순천노회 15인 사건’이라 한다.

목포에 도착한 변요한 선교사

그 머나먼 태평양을 가로지르면서 항해하던 배는 어느덧 일본 고베 항에 도착했다. 고베 항은 일본 관서 지방의 관문이기도 하고 흔히들 국제도시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래서 일본 주재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가 고베에 자리 잡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변요한 선교사 부부는 고베 땅에 도착해 이곳에서 활동하고 있던 선교사들과 만나 담소를 나누면서 그 지루한 태평양 여행의 피로를 잊고 있었다.

고베를 떠난 이들은 다시 목적지인 목포항까지 4일간이란 긴 여행을 거쳐서 1903년 11월 10일 배유지, 오원, 스트레퍼 선교사들의 환영을 받으면서 목포에 상륙했다.

“목포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곳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저희들은 바다와 섬들과 산들로 이루어진 멋진 자연 경관을 즐길 수 있습니다. 이곳은 조수 간만의 차가 큰 편인데 대략 20피트 정도입니다. 그래서 조수가 빠져 나가면 황량한 개펄이 내려다 보입니다. 목포에는 대략 4~5천 명이 살고 있으며, 그 가운데 대략 1천 명은 일본인들입니다. 어느 정도 우편, 전보, 해외 전보를 이용할 수 있으며, 따라서 외부 세계로부터 완전히 고립되어 있다고 느끼지는 않습니다.”(변요한, 1903년 11월 10일. 목포에서의 서신)

목포에 도착한 변요한 선교사는 즉시 미국에 계신 어머니에게 서신을 보내면서 목포 사정에 대해서 자세하게 보고했다. 그리고 주일을 맞이해 목포교회에 출석해 예배를 드렸으며 배유지 선교사의 통역으로 목포교회 교인들에게 인사를 했다.

“목포교회 교인 여러분, 방금 소개받은 변요한입니다. 이제부터 저는 전라도 사람이 되어 전라도 사람과 함께 생활하면서 복음을 전파하겠습니다.”

비록 짧은 인사였지만 전라도 사람이 된다는 말에 모든 교인들은 힘차게 박수를 보냈다.

그는 배유지 선교사의 안내를 받으며 목포 시내를 구경했다. 이미 상권이 형성될 만한 곳에는 모두 일본인들이 살고 있었으며 앞으로 목포를 국제도시로 만들기 위해서 곳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그동안 배유지 선교사의 좋은 협력자였던 김윤수는 그의 한국어 교사가 되어 매일 아침 10시~오후 1시까지 한국어를 강의했다. 집에 돌아와서는 부인과 함께 김윤수로부터 배웠던 한국어를 반복하면서 연습을 했다.

그런데 이들이 목포에 자리를 잡은 지 얼마 안 되어 배유지 선교사와 오원 선교사가 광주에 선교부를 신설한다면서 떠나고 말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목포진료소를 지키면서 선교하던 오원 선교사 대신에 노란(J. Nolan) 의료 선교사를 보내 주셔서 목포를 끼고 있는 도서 및 인근 지역의 환자를 돌볼 수가 있었다.

더욱 재미있었던 일은 목포선교부가 주최해 매년 한 차례씩 연 사경회 때 있었던 일이다. 이 사경회에 참석하기 위해서 신안 앞바다에 있는 섬 주민은 물론 진도, 완도 앞바다에 있는 섬 주민들까지 모두 먹을 양식과 찬거리, 그리고 잠을 잘 수 있는 이부자리까지 준비해 온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복음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는가를 찾아볼 수 있었다.

이렇게 열심 있는 교인들을 본 변요한 선교사는 뜻밖의 모습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교통 여건이 좋지 않은 섬사람들은 어렵게 사경회에 참석했으며 육지에서 오는 교인들도 마찬가지였다. 그 추운 겨울이지만 마을 단위로 우마차에 짐을 싣고 목포까지 오는 그 모습을 통해 장차 목포가 한국 교회의 성지가 될 것을 몇 번이고 예감했다.

목포 지방 교인들의 열의에 사경회 강사들은 더욱 열심을 내었다. 군산에서는 전위렴 선교사, 전주에서는 최의덕 선교사, 서울에서는 이눌서 선교사, 가까운 광주에서는 배유지 선교사, 오원 선교사가 강사로 참가해 수고해 주었다.

한편 그의 부인도 남편에게 뒤질세라 여성 사경반을 운영하면서 그들에게 성경을 가르쳐 주었으며, 평일에는 정명여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했다.

안영로 목사

· 90회 증경총회장

· 광주서남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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