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자익 목사는 호주 선교회의 요청으로 1925년부터 1936년까지 거창지역 순회 목사로 사역했다. 그 기간 중 나이 50세 때인 1929년 1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 1년 동안의 삶과 사역 내용을 기록한 국한문 자필본 일기가 현대어로 풀이되고 해제(解題)되어 그 내용이 알려졌다. 이 일기에는 경남의 거창 지부를 총괄하며 교회를 돌보았던 이자익 목사가 만난 수많은 인물과 사역했던 교회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이자익 목사의 주님을 향한 열정과 헌신을 피부로 느낄 수 있어서 감동적이다.
이 일기가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이자익 목사가 관계했던 교계의 거물급 선교사들과 조선인 교회 지도자들의 이름이 자주 등장한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이자익 목사의 위상과 한국 교회사의 숨겨진 대목들을 새롭게 발견할 수 있다.
또한 이 일기를 통해 최의덕(崔義德, Lewis Boyd Tate) 선교사의 사망 연도가 1929년 3월 전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자익 목사는 3월 20일 일기에서 최의덕 목사의 별세 소식을 들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친구 함태영 목사의 3남 함병창의 사망 연도가 1929년이라는 단서가 발견된다. 이자익 목사는 1월 18일 자 일기에서 친구 함태영 목사의 차남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언급했다. 그러나 차남 함병승의 사망 연도는 1956년이기 때문에, 아직 밝혀지지 않은 3남 함병창의 사망 연도일 가능성이 크다.
더 중요한 것은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경남노회 ‘특별노회’ 날짜가 이 일기에 수록되어 있어서 역사적 사료 가치가 높다. 일기에는 제18회 총회(새문안교회) 직전인 1929년 9월 5~6일 경남노회 ‘특별노회’가 회집되어 안건을 총회에 상정한 기록이 있다. 『경남노회사』에 보면 이때 총대는 목사 6명 장로 3명이었다.
이자익 목사는 50세의 고령에 건강하지 못한 몸을 이끌고 하루 24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교회를 돌보았다. 그는 바울처럼 여러 교회를 방문하고 많은 사람을 만났으며, 편지를 통해 지속적으로 소통했다. 어떤 때는 4시간 반을 걸어가서 20명 모이는 작은 교회 사경회를 인도하고 제직회를 주관하고 다시 4시간 이상 걸어서 집으로 와야 했다. 그는 총회장을 지낸 유명 인사지만 대접받는 자리를 마다하고 가장 어려운 벽촌 교회를 돌보았다.
한국교회 지도자들에게 이런 열정이 회복될 수 있다면, 교회는 다시 활력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문성모 목사
<전 서울장신대 총장•한국찬송가개발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