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은 북한의 공산주의자들이 남조선 적화를 노리고 일으킨 민족 내부의 전쟁이었던 것을 우리가 잘 알고 있다. 미국과 소련의 패권 전쟁을 배경으로 하는 동서 냉전의 호전적 성격을 띤 전쟁이었다.
그러니까 68년 전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였다. 그들의 작전 명령으로 북한군이 무력 남침을 했다. 북한의 인민군은 소련의 지원을 받으며 38선을 넘어서 남침했던 동족상잔을 되새겨 보는 것이다.
나는 당시에 중동중학교 3학년으로 종로구 옥인동 이모 집에서 하숙하며 당시 17세 나이로 학교에 다녔다. 북한의 남침으로 3일 만에 서울이 점령되고 광화문과 서울시청 옥상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붉은 깃발이 휘날리는 것을 보았다.
당시 학교에 등교하라는 방송이 나와 등교해서 보니 학급 반장들은 따로 모이라고 해서 3학년 4반 반장으로 나가보니 반장들은 모이는 학생 명단을 작성하고 트럭에 승차하라고 해서 그 일을 하다가 3일째 되는 날은 몸이 피곤해 등교하지 않았다. 이모집 지하에서 은둔 생활을 하다가 멀리서 들리는 대포 소리 폭격 소리가 은은하게 퍼져 들렸던 것을 생각한다.
이렇게 지내다 보니 시골 용인 고향에 있는 가족들이 모두 포격으로 참사당했는지, 피란 가서 집은 폭격으로 파손되지나 않았는지 걱정이 되어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이모에게 시골 가겠다고 했더니 네가 어리고 약한 몸에 어떻게 가느냐 하시며 만류하셨으나 그래도 간다고 했더니 조심해서 다녀오라 하셨다.
한강 철교는 끊어지고 갈 수 없어서 광나루의 다리를 건너 경기도 광주를 지나 용인 모현면에 도착했고 숨어가며 하루 종일 걸었다. 가는 도중 보이는 하천의 다리들은 모두 공습에 의해 폭격 파손된 것을 보았다.
저녁 6시경 집에 도착해 보니 가족 모두가 마차를 가지고 남쪽으로 피란 가시고 할아버지 혼자서 계셨는데 나를 보시고 네가 어떻게 살아서 왔느냐고 부둥켜안고 우셨고 나도 함께 울었다.
6.25 당시 학도병으로 희생당한 장진호 전투 관계로 희생된 작전 현황과 학도병이 어머니에게 쓴 편지를 인용해 소개해 오늘의 대한민국 현실과 6.25를 다시 한번 되새기겠다.
당시 6.25 전쟁 3일 만에 서울이 점령되고 2개월도 되기 전에 포항을 거쳐 부산으로 진입하려던 북한군 706유격대가 1950년 8월 10%쯤 남아있는 대한민국을 지키겠다고 학도병들이 나타났다.
포항여자중학교에 집결된 71명의 학도병에게 250분의 실탄이 지급되었다. 사단본부를 사수하라는 것이다.
최석산 장로
흑석성결교회, 수필가, 사진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