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정에 대한 몇 가지 기록들이 일치하지 않는다. 그의 이름을 쓰는 데도 조정 廷과 뜰 庭을 쓰므로 일치하지 않는다. 또 그의 출신 문제이다. 그가 全州 李 氏라면 정치인으로 출세할 수 있으므로 큰 역량을 발휘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개화사 연구>를 쓴 이광린은 “그가 蔚山 李 氏인듯 하고 서울 출생인 듯하다”고 했다.
또한 그가 平昌 李 氏였다면 그 가문에는 천주교인이 많았다. 李昇薰이 순교자였으며, 그의 숙부가 순교했다는 것도 합리화된다. 그의 족보가 확실치 않다. 이광린은 그가 양반이 아니라 관직은 없었으며, 양반이 아니므로 예수를 믿었고, 그는 상인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를 평창 이 씨로 보았기 때문이다.
천주교인으로 박해를 받고 순교자가 있는 가문이므로 관직이 없었을 것이다. 그를 상인으로 보았다. 이수정은 인삼을 거래하면서 閔泳翊의 수하에서 살았다. 그래서 민영익이 일본에 파견하는 신사유람단에 그를 포함시켰다. 만일 이수정이 양반이 아니고 인삼상인이었다면 어떻게 동경대학교 한국어 교수가 되었으며, 그의 신앙고백이 훌륭한 문장으로 사방에서 글을 써달라고 청탁이 되었을까? 이수정이 인삼 상인이었다는 데는 오윤태도 동의한다. 그러나 오윤태는 이수정이 높은 수준의 사람이요, 학자이며 왕족이라고까지 주장했다. 그렇다면 전주 이 씨로 여겨진다.
다른 의문은 관직이다. 민경배는 ‘統理 外務 衙門의 協辦’으로, 김양선은 ‘弘文館 校理’로, 백낙준은 ‘承文院 校檢’으로, 오윤태는 왕족이자 ‘宣略將軍’을 지낸 從5品으로 보았고, 장병일은 왕궁에서 年曆記者인 도승지라고 했다. 李光麟은 홍삼무역을 하는 상인으로 보았다. 이 증거들은 상인으로 또는 민비를 구출한 장군이다. 그렇다면 문인은 아닐 것이다.
둘째로, 그가 낙스에게 세례를 받았다는 것과 야스가와(安川亭) 목사에게 세례를 받은 설도 있다. 낙스에게 받았다는 설은 일본목사에게 세례 받지 않았다는 것으로 합리화될 수 있을 것이다. 선교 초기에 개종자들이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세례는 본 교회 당회장에게 받는 것이 장로교 법으로 타당하다. 그러므로 야스가와 목사에게 세례 받았다는 것이 합당하다.
셋째로, 중요한 사실은 귀국 후 행방이다. 최초로 백낙준의 <한국개신교사>의 ‘배교 설’이다. “이수정은 귀국을 앞두고 기독교 신앙에서 이탈하였다.” 이것은 미국 북 장로교 외국선교부의 엘렌 C. 파아슨(Ellen C. Parson)이 저술한 <한국선교 15년사>에 “잃어버린 지도자”란 글에 나온다. 파아슨은 “가련한 이수정은 좋지 못한 영향에 빠져 미국인에게 한국에 대한 관심을 적지 않게 불러일으켰지만 그는 열려 있는 문을 박차버렸다”고 했다.
일본주재 미국장로교 성서공회 총무 루미스가 성경번역을 요청해서 신약성경을 번역하기로 약속한 후 관심을 성경번역에 쏟지 못하는 데 대한 배신감을 느꼈을 것이다. 루미스의 선교보고서를 본 파아슨이 기록한 것으로 여겨진다. 김인수도 이수정이 “신앙을 버렸다면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고 했다.
루미스는 “Friend of the East. Things Korea”에서 “그리하여 마침내 1886년 5월에 귀국했는데 귀국하자마자 곧 보수당에 붙잡혀 온몸을 토막토막 잘리는 형벌로 처형되고 말았다”고 했다. 이것이 [배교 설]의 배경이다. <한국기독교 인물 사>에서 김광수는 “이수정은 귀국하자마자 보수당에 의하여 체포되었고 비밀리에 무참히 처형되었다”고 했다. 이수정의 친구 안종수가 [갑신 잔당]으로 몰려 충청도 해미로 귀양 간 것도 이 무렵이었다.
이승하 목사<해방교회 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