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가는 나라 사랑의 노래이다. 나라 사랑의 의지적 표현으로 애국가는 태어났고, 역사를 만들어 왔다. 일제강점기 이전에 애국가가 먼저 만들어졌다. 그때의 애국가는 독립이라는 개념과 함께 불렸다. 그리고 그 독립이나 애국은 일본을 상대로 한 것이 아니라 중국(청)에 대한 독립이고 애국이었다. 서재필의 독립신문 창간이나 독립문 건립 등은 모두 중화사상에 젖어 조선을 속국으로 생각하던 중국의 오만함에 대한 반기였다.
그러나 청일전쟁의 패배로 중국이 물러가자 일본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고, 이때부터 애국이나 독립은 일본에 대한 항거의 개념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10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 삼일운동이 일어나며 애국가는 독립운동의 구심체 역할을 하였다.
군중은 애국가를 부름으로 나라의 독립에 대한 의지를 불태웠고, 일본의 총칼 앞에서 담대하게 힘을 집결시켰다. 1919년 7월 샌프란시스코에서 출판된 『한국독립운동의 진상』이라는 책에는 3·1운동 당시 평양의 독립운동 장면을 묘사한 다음과 같은 목격담이 실려 있다.
“군중은 무장하지 않았으며 행렬은 젊은이와 학생은 물론 노인과 일반인들로 구성돼 있었다. 군중은 「올드 랭 사인」 곡에 맞춘 한국의 국가(National Anthem)를 부르면서 국기를 흔들고 만세를 외치면서 거리를 꽉 메웠다.”
일제와 맞서 싸우던 독립군들도 애국가를 함께 부르며 독립운동을 했는데, 다음은 중국 용정의 3월 13일 독립선언식의 풍경을 기록한 글이다.
“대회는 먼저 애국가 제창으로 시작되었다. 1만 군중이 설움으로 목메어 울며 부르는 애국가의 노랫소리는 동남산에 메아리쳐 마치 하늘에서 옥황상제가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조선 침략 죄행을 성토하고 그의 말로를 선포하는 듯한 그런 비장한 장면을 방불케 하였다.”
독립군들은 애국가를 부른다는 것만으로도 죄가 되어 잡혀갔다. 하지만 그들은 옥중에서도 애국가를 불렀다. 해주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임시정부 요원 22명은 1923년 4월 10일, 임시정부 창립일을 기념해 애국가를 부르다 폭행을 당해 중상을 입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또다시 단식 투쟁으로 저항했다.
독립운동의 일등 공신인 우리나라의 애국가에 얽힌 역사성을 안다면, 애국가를 폄훼하는 행동이나 발언은 은혜를 모르는 자들의 만행이다.
문성모 목사
<전 서울장신대 총장• 강남제일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