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회에 이어, 1861년 영국인 존 테일러가 고대 유적지 쿠르크(Kurkh, 오늘날 터키 중부 지역)에서 발굴한 석비에 관한 이야기를 계속한다. 학계에서 ‘쿠르크 석비’라고 부르는 이 석비가 우리의 관심을 끄는 이유는 고대사에서 유명한 ‘칼칼 전투’에 관한 기록과 함께 북이스라엘의 아합 왕이 이 전투에 참전했다는 사실이 석비에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쿠르크 석비의 주인공은 앗수르 제국의 왕 살만에셀 3세이다. 이 석비에서 그는 자신을 ‘나’라고 호칭하며, 서방 원정을 기록했다. 그는 원정길 도중에 많은 작은 도성들을 정복하며 마침내 아람의 북부, 오론테스 강변의 도성 ‘칼칼’(Qarqar)까지 왔다. 계속해서 석비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나는(=살만에셀 왕) 칼칼 도성을 무너뜨리고 왕궁까지 불태워 초토화시켰다.” 그 다음 석비는 살만에셀에게 대항했던 12개국의 나라들과 왕의 이름, 그리고 군사력을 상세히 기록했다. “아람(의 왕) 하다드에셀, 병거 1200대, 마병대 1200명, 병사 2만 명… 이스라엘(의 왕) 아합, 병거 2000대, 병사 1만 명….”
이런 식으로 12개 나라들을 열거한 후, 살만에셀은 이들과 싸워 크게 승리했다고 기염을 토한다. “나는 1만 4천 명의 적군을 칼로 죽였다… 그들의 시신으로 오론테스 강에 다리를 놓았다.” 고대 제국 왕들의 전형적인 전승 기록이다. 그러나 오늘날 역사가들의 평가는 조금 다르다. 칼칼 전투로 앗수르 제국의 힘과 위세는 충분히 보여주었으나, 연합군을 조직했던 12나라들은 완전히 궤멸하거나 정복하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전투 후에 아람의 왕도, 이스라엘의 아합 왕도 건재했고, 더구나 앗수르 제국은 그 후에도 몇 번 더 아람을 공격해야만 했다. 이는 칼칼 전투로 아람을 완전히 굴복시키지 못했음을 알려준다.
이보다도,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아합 왕에 관한 기록이다. 아합 왕은 1만 명의 병사들과 함께 2000대의 병거를 이끌고 전투에 참전했다고 한다. 고대에 말이 끄는 이륜 마차를 타고 싸우는 병거(chariot)는 강력한 군사력의 상징이었고, 흔히 전투의 승패를 가르는 최강의 부대였다.
칼칼 대전에서 12나라 군대의 병거는 총 3940대였다. 그중에 아합 왕의 병거는 반수가 넘는 2천 대였다. 석비 기록에 따르면 병거가 전혀 없는 나라가 다섯 나라나 되었고, 두 나라는 각각 10대, 30대가 출전했다. 연합군의 맹주 역할을 했던 아람도 1200대였다. 이에 비해 아합 왕이 2천 대의 병거를 파병했다는 것은 북이스라엘이 당시 군사 강국이었음을 말해준다.
이스라엘은 언제부터 강한 병거 부대를 갖추게 되었을까? 병거 부대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이를 창설하고, 병거성(cities of chariots)까지 건설하여 말을 키우고 훈련시킨 인물은 솔로몬 왕이었다. 이에 관해 열왕기는 이렇게 기록했다. “솔로몬이 병거와 마병을 모으매 병거가 1400대요, 마병이 12000명이라. 병거성들에도 두고 예루살렘 왕에게도 두었더라.” (왕상 10:26) 솔로몬은 확실히 선견지명이 있는 왕이었다. 솔로몬 왕은 하솔, 므깃도, 게셀을 건축했다. 그중에 므깃도에서 대규모 마구간과 훈련장이 발굴되었다. 므깃도는 이스라엘의 병거성 중의 하나였음이 고고학적으로 확인된 것이다.
박준서 교수
<피터스목사기념사업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