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다섯 장씩 읽어가는 느린 성경통독이 구약 사사기에 이르러 오늘 사사 입다 이야기를 통과했다. 이름도 나오지 않는 불쌍한 입다의 딸은 아비의 무모한 서원으로 인해 꽃다운 처녀의 몸으로 생을 마친다. 암몬 족속과 싸우러 나가며 입다는 여호와께 약속하기를 이스라엘에 승리를 안겨주면 개선하여 돌아올 때 맨 먼저 환영해 나오는 사람을 번제물로 바치겠다고 했다. 암몬 족속을 무찌르고 입다가 자기 집에 이를 때 그의 무남독녀 딸이 소고를 잡고 춤추며 맞이하니 승리의 기쁨은 슬픔으로 돌변했다.
이런 일방적인 서원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은 없었으나 입다는 자기가 서약한 바를 돌이킬 수 없음을 딸에게 고하니 착한 딸은 희생의 제물이 되기로 하되 두 달 동안 산에서 친구들과 마지막 날들을 보내겠다고 간청한다. 입다는 이를 허락하고 딸은 기한에 돌아와 죽음을 맞는다. 이 구슬픈 에피소드를 읽으며 나는 입다의 딸이 여자친구들과 산으로 올라가 차라리 애굽이나 시리아나 어디 먼 곳으로 도망해버리지 왜 집으로 돌아왔나 애통한 마음이 되었다.
이름 없는 그 딸이 두 달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으면 여호와께서 입다와 이스라엘 백성에게 어떤 심한 벌을 내리셨을지, 아니면 자비로우신 마음에서 그냥 잊어버리셨을지 모른다. 사사기는 몇 사람을 거쳐 삼손의 드라마틱한 생애로 이어지는데 하나님은 인간의 실수와 배반과 회심을 쭉 보고 오시며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알 수 없는 계획을 펼치고 계신다. 여호와 하나님이 역사를 주관하심을 알면서도 사람들은 순종과 거역을 반복하고 저희들끼리도 무슨 약속을 하고 깨뜨리고 하면서 세상이 복잡하게 돌아간다.
입다의 허망한 서원에서 오늘 이 땅을 시끄럽게 하는 정치적 공약들을 떠올린다. 5년에 한 차례씩 대통령 선거가 있고 그때마다 100대 공약이니 30대 공약이니 하는 것들을 각 당 후보들이 내놓는데 이 나라의 정치문화는 그러한 개개의 정강정책보다는 양쪽으로 나뉜 정치세력에 대한 유권자의 신뢰도와 기대에 좌우되어 왔다. 2017년 선거에서 문재인 후보가 들고나온 공약들 가운데 국민의 기억에 남아있는 거라고는 소위 ‘탈원전’과 ‘4대강 복원’ 정도인데 두 가지 다 반대여론이 날이 갈수록 높아간다.
어느 후보가 선거에서 더 많은 득표를 했다고 그의 공약 하나하나가 모두 국민의 승인을 받은 것이 아니다. 국내외의 변화하는 상황 아래서 최선의 방향으로 정책을 수정하고 국민의 여론을 물어가며 이를 시행하는 것이 옳다. 나쁜 공약을 지키려 드는 것은 지키지 아니함만 못하다. 어느 정권에 대한 국민의 지지는 날마다 들리는 지도자의 말씀과 보이는 행동, 고위직에 임명되는 인물들의 됨됨이 그리고 돌발하는 위기에 대처하는 능력에 따라 오르고 내리고 하는 것이지 선거공약의 이행에 전적으로 달려있지 않다.
국가 간이나 개인 간에 약속은 준수되어야 한다. 하지만 선거공약은 각 정파가 좋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일방적으로 그럴듯하게 모아놓은 것이어서 쌍방 간의 약속과는 다르다. 입다가 자기의 혈육이건 누가됐건 사람을 개선축제의 제물로 바치겠다 서약한 것은 어리석은 짓으로서 하나님의 마음을 붙잡았을 리 없다. 오늘의 정치지도자들은 폐기해야 하는 어설픈 공약에는 매달리면서 정작 지켜야 할 국민과의 엄중한 약속은 저버리는 모습을 보인다.
김명식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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