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이슈] 달란트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사람들 (280)고찬익 장로 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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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년 서울 새문안교회에서 서경조, 김종섭, 방기창 세 명의 장로와 양전백, 송순명, 최홍서, 천광실, 고찬익, 유태연 여섯 명의 조사 그리고 25명의 선교사들이 제1회 조선야소교 장로회 공의회를 조직했다.
1902년 가을, 고찬익은 평안북도 관찰사를 지낸 박승봉 대감을 전도하려고 접근했다. 순 한문 복음서를 갖고 박 대감을 찾아갔다. 그리고 한문을 가르쳐 주기를 청했다. 매일 박 대감에게 마태복음을 배우면서 요절을 읽을 때는 그것을 해석하곤 했다. 그런 중에 성경에 감화되어 그것이 기독교의 성경임을 알게 되었다. 고찬익은 박대감에게 예배당에 한번 구경 오시라고 청했더니 호기심으로 어느 주일 연동예배당에 나왔다.
자기에게 글을 배우던 시골 서생인 고찬익이 단상에서 설교하고 단하에는 이상재, 이원긍 민준호 등 귀인, 명사들이 앉아서 그의 설교를 듣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설교를 듣고 있는 교인이 1천여 명이나 되었다. 이런 장면을 본 박 대감은 그제야 고찬익은 자기학도가 아니라 예수교의 대 선생임을 알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폐회한 뒤에 고찬익을 만나 예를 갖추었다. 이리하여 박승봉은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 후 북촌에 있는 안동교회에서 장로로 시무했다.

김린서 목사는 “선생에게 일찍 닦은 학문이 없고, 미리 배운 웅변이 없었으나 복음의 신앙과 사랑의 실행으로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었습니다”라고 했다. “또 백 권의 목회학을 읽고 천종의 전도 방법을 배우고 만언의 사랑의 설교를 외칠지라도 이 마음 이 실행이 없이는 모두 공문이오. 공담에 불과한 것이다”라고 [신앙생활] 잡지에 기록했다.
길선주 목사는 “고 장로는 경성교회의 기초역사(基礎歷史)에 가장 유공한 전도자이었습니다. 그리고 고 장로는 사랑과 겸비 등 신덕으로서 만인을 감화하였고 또한 만인의 존경을 받을 만한 개척자이었습니다”라 하였다.
연동교회 성도들은 “게일 목사도 고 장로의 인격에 감동하여 저를 심히 존경함으로 사람들은 게일 목사 다음에 고 장로가 아니라 고 장로 다음에 게일 목사라고 하였다”고 한다. 게일 목사는 1903년 고찬익 조사에 대한 실명소설 <선봉자>(The Vanguard)를 집필했다.
고찬익은 게일 목사의 선교에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었다. 인간적으로도 너무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예수를 믿게 될 때 고찬익을 <형님>이라고 불렀다. 진정 그들은 형제지간처럼 친했다. 그리고 원산에서 전도하는 데 둘은 손발이 잘 맞았으며 교회를 크게 일으키는 기적적인 협동관계였다. 마치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처럼 절친했다.

고찬익은 만나는 사람마다 게일 선교사를 소개하며 전도했다. 고찬익이 말을 얼마나 잘 하는지 게일 선교사는 점점 더 고찬익을 사랑하게 되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고찬익이 노래를 잘하고 춤도 잘 춰서 전도할 때도 노래와 춤으로 많은 사람을 모았으며 그 후에 우렁찬 목소리로 청산유수 같이 말을 하니 듣는 사람들이 그의 전도하는 말에 솔깃하여 감화 감동했으며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모여왔다. 그래서 게일 목사는 우리나라 고유의 곡조에 맞추어서 장구, 북, 꽹과리 등을 악기로 사용하는 찬송가를 만들어 예배 시간에 부르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시간만 나면 고찬익에게 우리나라의 민요, 소리 등을 배웠다. 또한 장구, 북, 꽹과리 치는 것도 배웠다. 그래서 다른 선교사들은 게일을 미쳤다고, 이단이라고, 신신학자라고 비판하며 조소하였다. 어떤 때는 친구도 없이 고독하게 지냈다. 하지만 게일 목사는 무슨 말을 해도 고찬익과 같이 어떤 때는 한방에서 먹고 자며 한국 전통의 춤과 소리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이승하 목사<해방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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