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9년 벨기에 브뤼셀의 한 병원에 아기를 업은 한 여인이 헐레벌떡 들어왔다. “우리 딸이 며칠 전부터 심하게 기침을 합니다.” 생후 3개월이 된 갓난아기였다. 숙직의사는 청진기로 아기의 몸 상태를 이리저리 체크했다. “단순한 감기가 아닙니다. 백일해입니다. 연령이 낮을수록 위험한 병입니다. 이 아이는 조금 위험한 상태입니다.” 다행히도 아기는 의사와 엄마의 극진한 보살핌 덕분에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하지만 걸음마도 떼기 전에 죽음의 문턱을 넘었던 아기의 비극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아기가 건강하게 자라 열 살이 되었을 때 부모가 이혼하게 된 것이다. 나치 추종자였던 아버지는 가족을 떠났고 아이는 할아버지 손에 맡겨졌다. 아이는 이때부터 ‘오드리 헵번(Audrey Hepburn)’ 이라는 이름을 쓰게 되었다. “난 발레리나가 될 거야.” 오드리 헵번은 발레를 좋아하는 꿈 많은 발레리나로 무럭무럭 자라났다. 하지만 170cm에 달하는 큰 키가 문제였다. 그러나 꿈에 대한 그녀의 열정은 멈출 수가 없었다. 헵번은 짐을 꾸려 영국으로 건너갔다. 연극과 영화에 출연하며 자신의 꿈을 향해 한 걸음씩 걸어갈 즈음 우연히 브로드웨이 연극 <지지>에 캐스팅되었다. 이 작품을 계기로 <로마의 휴일>에 출연할 수 있었다.
오드리 헵번의 사실상 데뷔작 <로마의 휴일>은 그녀를 일약 은막의 여왕으로 부각시켰다. 특히 공주님의 사랑이라는 동화 같은 주제가 로마를 무대로 펼쳐지면서 숱한 여성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 공주 역을 맡았던 오드리 헵번과 신문기자 역의 그레고리 팩은 외모 뿐만 아니라 뛰어난 연기력으로 호평을 받았다. 이 작품으로 그녀는 소위 헵번스타일이라는 숏커트 헤어스타일을 유행시키기도 했다. 그녀는 영국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뉴욕 비평가 협회상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으며 스타덤에 올랐다. <사랑과 평화>, <사브리나>, <티파니에서 아침을> 등 영화에 출연, 호평을 받았다. 그리고 그녀는 유니세프 친선대사가 되었다. 우연히 참석한 기금모금 행사에서 자신의 영화배우 경력이 세상 사람의 관심과 신기함으로 남아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직도 나를 잊지 않고 기억하는 사람이 많구나. 영화의 힘이란 정말 놀랍다.’ 헵번은 “유니세프에 대한 감사와 신뢰의 마음은 평생 변하지 않겠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전쟁 피해 아동의 구호와 저개발국 아동의 복지 향상을 목적으로 설립된 국제연합 특별기구인 유니세프는 백일해 때문에 죽음을 경험했던 오드리 헵번에게 숙명처럼 다가왔다. 60세를 바라보는 나이에 유니세프가 원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달려갔다.
“과거 은막의 스타가 인기가 떨어지니까 별 쇼를 다하는구만. 몇 달 그러다 말겠지!”라는 비난과 조롱을 물리치고 굶주림과 병으로 죽어가는 어린이들의 슬픈 현실을 세상에 알렸다. 곤경과 죽음에 처한 아이들을 차마 외면할 수 없었고 그것은 죄악이라고 생각했다. 그녀의 발길은 아프리카 전 지역을 비롯해 방글라데시 엘살바도르 등 50여 곳이 넘게 이어졌다. 비행기를 타고 버스로 이동하는 험난한 여정이었지만 백발의 노구를 이끌고 걸어가는 그녀의 발걸음은 거침이 없었다. “어린이 한 명을 구하는 것은 축복입니다. 어린이 100만 명을 구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기회입니다.” 대장암 말기 진단을 받고 오랫동안 살았던 스위스의 집으로 돌아와 가족들과 함께 생의 마지막 시간을 보냈다. “63세, 저의 후반기 인생은 희생이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받은 선물이지요.” 우리 주변에도 섬김, 나눔, 베풂의 현장이 지속적으로 넓어졌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