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고금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권력을 가진 위정자에 대해서 불만과 원성이 쌓이고 쌓이면, 언젠가는 터지게 마련이다. 솔로몬 왕의 경우가 그러했다. 솔로몬은 이스라엘 12지파 전체의 왕으로서 모든 지파에게 공정하고 공평한 정책을 펼쳤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자기가 속한 유다 지파(이 안에는 시므온 지파가 융합되어 있었다)만을 편파적으로 우대하고 나머지 10지파는 차별하는 정책을 썼다. 당연히 10지파의 불평과 불만이 생길 수밖에 없었고, 이는 10지파와 유다 지파 사이의 분열과 갈등의 씨앗이 되었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이스라엘 10지파와 유다 지파 사이의 균열은 뿌리 깊은 원인이 있었다. 다윗·솔로몬 왕국 시대 이전, 사사 시대는 왕도 없고 정규 군대도 없어 이스라엘의 힘이 약했던 시대였다. 이때 주변의 이방 나라들은 약한 이스라엘을 계속 괴롭혔다. 가장 큰 적은 블레셋이었다. 막강한 블레셋의 공격 앞에서 이스라엘은 벤야민 지파 출신 사울을 왕으로 세우고 왕정으로 전환했다. 그러나 사울 왕은 블레셋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길보아 산 전투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혈통으로 왕위가 계승되는 고대의 전통에 따라, 사울 왕의 아들 ‘이스보셋’이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블레셋의 위기를 극복하기에는 역량이 부족한 인물이었다. 이때 유다 지파의 다윗은 헤브론에서 단독으로 ‘유다 왕국’을 세우고 왕이 되었다. 이로써이스라엘에는 두 명의 왕이 생겨나게 되었다. 사울 왕의 뒤를 이은 이스보셋 왕과, 유다 지파의 다윗 왕이었다. 10지파는 사울 왕가의 법통을 이은 이스보셋 왕을 지지했다. 그리고 유다 지파 중심으로 ‘유다 왕국’을 세우고 스스로 왕이 된 다윗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10지파와 유다 지파(시므온 지파가 포함되어 있음을 기억) 사이의 분열과 갈등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공동의 적인 블레셋을 앞에 둔 위기의 상황에서, 사울 왕가의 법통을 지지하는 10지파와 다윗 왕을 지지하는 유다 지파 사이에는 무력 충돌과 전투가 끊이지 않았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내우외환의 상황은 7년 반이나 계속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대세는 다윗 왕 쪽으로 기울어져 갔다.
이런 상황에서 10지파에게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이스보셋 왕을 보좌하던 측근 장수들이 왕을 시해한 것이다. 무능한 왕으로서는 블레셋의 위기를 도저히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한 두 명의 장수가 거사를 일으킨 것이었다. 계속되는 블레셋의 공격 앞에 왕까지 시해당한 상황에서, 10지파 지도자들은 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들은 발길을 헤브론으로 옮겨 다윗 왕 앞에 무릎을 꿇었다. “우리들의 왕이 되어주소서.” 이렇게 해서 다윗은 이스라엘 12지파 전체의 왕이 되었다. 생존의 위기 상황에서 10지파는 다윗 앞에 굴복했으나, 그들의 마음속에는 다윗과 유다 지파에 대한 불편한 심기와 응어리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다윗은 천부적인 군사적 지도였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지혜로운 인물이었다. 그는 10지파의 심기를 거슬리는 일을 피하면서, 유화 통합 정책을 펼쳤다. 그럼에도 벤야민 지파 출신의 세바라는 사람이 반(反)다윗, 반유다 지파의 기치를 들고 ‘세바의 반란’을 일으키고 다윗 왕을 극도의 궁지에 몰아넣는 일도 일어났다. (사무엘하 20장)
박준서 교수
<피터스목사기념사업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