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필자는 선교사 파송하는 일로 태국을 다녀왔다. 태국 치앙마이 근처 람푼에 있는 한 선교센터에서 겪은 일이다. 그 선교센터 마당에는 죽죽 자란 나무들이 많았다. 그 나무 중 하나가 우연히 필자의 시선을 붙잡았다. 나의 눈높이만한 위치에 젓가락 굵기의 철사 줄이 나무에 박혀 있었다. 철사 줄의 양쪽 끝이 나무에 푹 꽂혀 있었다. 그 철사 줄 가운데에는 손바닥 넓이의 양철판이 매달려 있었다.
그 양철판에는 R로 시작되는 몇 개의 영문 알파벳과 아라비아 숫자로 이루어진 글자들이 새겨져 있었다.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다. 내 생각에는 아마도 그 나무의 일련번호가 아닌 듯싶었다.
아마도 제법 오래 전에 나무들마다 일련번호를 매겨두지 않았나 싶다. 그때에 그 일련번호를 적은 양철판을 철사 줄에 매달아서 그 나무에 꽂았겠다 싶다.
필자는 그때 그 나무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나무가 말을 못해서 그렇지 얼마나 아팠을까. 만약에 나무가 말할 수만 있다면 아마도 ‘많이 아픕니다.’ 그렇게 말하지 않았을까 싶다. 나무는 말을 할 수 없다. 아파도 아프다고 말할 수 없다. 그 어떤 의사표시도 못한다. 더군다나 자기 몸에 꽂힌 철사 줄을 뽑아낼 수 없다. 뽑아버릴 수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뽑아버리고 싶었겠다.
그런데 그렇게 할 수 없다. 그냥 아파도 아픈 채로 살 수밖에 없다. 나무는 철사 줄을 몸에 둔 채로 잘 자라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는 몰라도 나무는 철사 줄을 덮고 잘 자라고 있었다. 나무는 자기 몸에 박힌 철사 줄을 품고 잘 자라고 있었다. 나무 겉껍질이 철사 줄을 많이 덮었다.
그때 필자는 이런 생각을 했다. ‘그래, 뽑아버릴 수 없다면 품고 살자.’ 사람들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때때로 이런저런 상처를 받는다. 아플 때도 많다. 몸만 아픈 것이 아니다. 마음이 아플 때가 있다. 가슴에 대못같이 큰 상처가 날 때가 있다. 제발 잊고 싶은 기억도 있다. 마음 한구석에 자리잡은 미움도 있다. 그 모든 것들을 잊고 싶지만 잘 잊혀지지 않는다. 그런 아픔과 상처를 뽑아버릴 수 없다면 품고 살아야겠다. 아픔도 상처도 그냥 사랑으로 품고 살아야겠다.
그렇게 세월이 지나면 그 상처가 진주 같은 보석이 될 줄 누가 알겠는가? 진주는 상처를 품고 세월을 이긴 조개에서 생긴다고 하지 않는가? 내 아픔이 다음에 나를 빛나게 하는 보석이 될 줄 어찌 알겠는가?
그래, 뽑아버릴 수 없다면 사랑으로 품고 목양의 길을 가야겠다.
민경운 목사
<성덕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