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식회사 광일의 전성기(23)
광일의 이름으로 여는 세상
해외로 뻗어가는 광일
주식회사 광일로의 변모
앞에서 살펴본 주식회사 광일이 산업의 예술품으로 승화하기 위한 전제적 조건으로서 광일 체제의 구축이라는 하드웨어의 형성 과정과 사람을 대우하는 경영방침이라는 소프트웨어를 통해 형성된 전체적인 시스템 안에서의 모든 광일 구성원의 협력으로 지금은 세계로 뻗어가는 광일의 새로운 역사를 창조해 가고 있다.
이는 이 두 차원의 목표를 종합한 산업의 예술품인 광일의 길 위에 주어진 축복이자 새로운 사명이었다.
1966년에 시작된 광일은 1970년대 들어 기업으로서의 기반을 갖추어 나갔으며 1980년대에는 본격적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사람으로 치면 청년기에 접어든 것이다. 조용희 회장과 이만영 회장은 40년 내내 광일을 달리게 하기 위해 불쏘시개처럼 살았다.
광일이 달리면 대한민국의 식품산업이 진보하고 한국인의 식생활이 개선된다는 큰 신념을 가졌기에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 열망에 걸맞게 광일은 날이 다르게 성장했고, 마침내 1984년 식품재료 수출기업의 반열에 오른 것이다. 전량 수입하던 식품원료를 자체 기술로 생산할 수 있게 된 것만도 대단한 일인데 불과 10년이 못되어 이제는 외국으로 수출까지 하게 된 것이다.
이만영은 첫 수출 계약서를 작성하고 날인하던 날 가슴이 벅찼다. 그 순간 18년 전 처음 사업을 시작했을 때부터 그때까지 겪었던 수많은 어려움들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쳐갔다.
혼자 어떻게든 개발해 보겠다고 유화제를 붙들고 며칠씩 밤샘을 하던 일, 개발한 제품을 들고 식품회사마다 찾아다니며 영업을 하던 일 등이 떠올랐던 것이다.
광일은 1986년 첫 수출 시장으로 동남아를 개척하였다. 이는 주식회사 광일이 미래를 열어 나가는 과정에서 새로운 과제로 세계 시장을 개척하기 위한 무역 업무를 확장해 나가고자 했던 시점이었다.
“우리 회사는 작년에 80여만 불의 수출 수입 무역거래를 하였으며 앞으로는 무역업무를 확장하여 수출시장과 수출상품을 개발하고 개척하는데 최대한 투자해 나갈 예정입니다. 작년도에 동남아에 수출시장을 개척한 일에 대해서 관계자들에게 높이 치하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세계 시장을 개척하고자 하는 기대와 희망은 현실로 이뤄졌다. 곧이어 동남아를 비롯한 호주와 일본 등지에서도 수출 업무를 개시하게 되었던 것이다. 내수 산업에서 수출 산업으로 기업의 발전을 도모했던 그동안의 힘겨운 노력들이 점차 결실을 맺어 나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주식회사 광일은 무역부 개설 후 호주, 필리핀, 일본 등지에서 약 50여만 불 수출 실적을 달성했다. 내수 산업에서 수출 산업으로 비약한 것이 회사 발전에 크게 공헌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광일은 회사 이름을 바꿔야 했다.
이에 대해서 이만영 회장은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회사 이름을 바꾸게 된 것은 우리가 무역을 하는데 소방차를 수입을 했어요. 업종이 달랐지요. 광일식품에서 소방차를 하느냐 하는 이의가 들려서 광일화학공업주식회사를 주식회사 광일로 바꿨지요.”
수출산업의 위기와 극복의 과정
그러나 주식회사 광일의 수출 산업은 1995년을 맞이하면서 커다란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이는 물론 광일 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세계 경제 질서를 근본적으로 뒤바꾸게 되는 wto체제가 시작되면서부터 전개된 전 세계적인 경제 위기였다.
그러나 이만영은 이러한 근본적인 위기 상황을 강력한 도전 정신으로 돌파하여 새로운 기회로 삼았다. 주식회사 광일의 경쟁상대는 국내 기업이 아니라 세계의 기업이라는 당찬 포부 속에 깃들어 있는 자부심과 자신감이었다.
“신문, tv를 통해서 보도된 바와 같이 1995년은 wto(세계무역기구)라는 세계 경제 질서를 근본적으로 뒤바꾸는 새로운 무역체제가 등장하는 시기입니다. 우리나라도 WTO의 가입을 결정했고 세계의 거의 모든 나라들이 이 기구에 가입을 결정했습니다.
이제 경제에 있어서 국경의 개념은 더 이상 효력을 발휘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국내시장, 해외시장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세계가 모두 하나의 시장을 이루어 살게 된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시장에서 경쟁상대는 국내 기업이 아니라 세계의 기업입니다.”
정봉덕 장로
<염천교회 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