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상륙작전(9.15)으로 서울을 수복(9.28)한 국군과 UN군은 예상보다 빨리 북진하고 있었다. 미8군사령관 워커 장군이 지휘하는 미제1기갑사단과 국군 제1사단은 서부전선으로, 미10군단장 알몬드 장군이 지휘하는 미제1해병사단과 국군 제3사단, 수도사단 등은 동부전선으로 북진하고 있었다. 국군 제6사단과 8사단은 중부전선 압록강 방향으로 진격하였고, 국군7사단은 중부로 북상하다가 평양 함락에 합세했다.
평양이 가까워지자 국군은 흥분하기 시작했다. 국군과 미군 사이에는 누가 먼저 평양에 입성하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서로 신경전을 벌이기도 했다. 평양이 고향인 백선엽 장군은 평양 입성의 순간을 생각하며 가슴이 벅찼다. 누구보다 먼저 평양에 첫발을 밟고 싶었다. 그런데 평양 인근 구화리(九化里)에서 미제5기갑연대와 만났다. 합동작전으로 평양에 입성할 계획 때문이다.
이때 미군은 금천(金川)에서 적의 주력부대를 포위해야 하기 때문에 한국군보다 먼저 평양에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백선엽 장군은 작전상 문제이므로 반대할 수 없었다. 그러면 먼저 가게 해 줄 테니 탱크 21대를 우리에게 빌려주고 가라고 요구했다. 백 장군의 생각은 평양으로 가는 지름길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국군 1사단이 먼저 도착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해서였다.
국군이 평양 근처까지 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평양 시민들은 환영 준비와 함께 서로 길을 안내하겠다고 평양 밖까지 나오기도 했다. 국군과 유엔군은 진출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미군은 하루 평균 18km 속도로 북진했으나, 이에 비해 한국군은 25km의 속도로 진격해 들어갔다. ‘북진통일’의 희망이 사기를 북돋았기 때문에 전력을 다할 수 있었다.
평양 입성은 국군1사단이 10월 19일 오전 11시경 제일 먼저 동평양 쪽으로 입성했다. 곧이어 국군7사단이 오후 1시경 김일성대학과 방송국을 점령한 후 서평양으로 입성했다. 미군들은 오후에 흑교리를 통해 평양에 입성했다. 시민들의 환영 인파는 축제 분위기였다. 숨어 지내던 반공지사들도 나와서 환호했다. 「대한민국 만세」「이승만 대통령 만세」, 「국군만세, 유엔군 만세」의 함성은 천지를 진동케 했다. 다음날 평양을 완전히 점령(10.20)했을 때는 통일을 이룬 것처럼 기쁘고 가슴이 벅차올랐다.
한편 김일성은 10월 16일 새벽 2시경, 소련제 고급승용차 ‘볼가’를 타고 평양을 탈출하여 차량으로 도주했다. 청천강변에 이르러서는 차량을 버리고 산속으로 들어가 적유령산맥의 험한 산길을 이용하여 걸어서 도주했다. (희천(熙川)에서 귀순한 김일성 호위군관의 증언) 반공애국시민들이 봉기하고 있기 때문에 주민들의 눈을 피해서였다. 압록강 국경도시 강계(江界)에 도착한 것이 10월 26일이다. 이날은 중공군이 제1차로 압록강을 건너 한국전쟁에 참전한 날이다.
육군 본부에서는 평양이 가까워지자 ‘김일성을 생포’했으면 좋겠다는 희망적인 대화들이 오갔다. 정일권 총장은 김일성이 평양을 이미 도주했을 것으로는 생각했지만, 공수작전을 통해 퇴로를 차단하면 김일성을 생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가져봤다. 그래서 워커 8군사령관에게 넌지시 말했다. 공수작전 할 계획은 없는가? 라고. 이때 맥아더 사령부는 공수작전을 이미 계획하고 있었다. 적의 퇴로를 차단하고 미군 포로를 구출하기 위해서였다. 평양 북쪽 56km 지점인 숙천(肅川)과 동쪽 27km 지점인 순천(順川)에 투입하기 위해 서울 여의도에 제187공수부대가 대기하고 있었다. 워커 장군은 정일권 총장의 말을 듣고 공수부대에 추가적인 임무를 부여했다. “김일성을 생포하라!”고.
10월 20일, 마침내 공수부대는 수송기 200대에 병력 4,000여 명을 태우고 작전을 개시했다. 그러나 김일성 생포에는 실패했다. 공수작전은 원래 3일 전인 17일에 계획했지만 날씨가 안 좋아서 20일로 연기된 상태였다. 따라서 적의 주력부대가 이미 지역을 벗어난 뒤였다. 매우 아쉬운 대목이다. 국군과 유엔군은 평양탈환작전에서 적 사살 3,600명, 포로 200명의 전과를 올리고 압록강을 향해 북진을 계속했다.
배영복 장로<연동교회>
• 한국예비역기독군인연합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