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과 지혜] 종교개혁가 장 칼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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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뱅은 1509년 프랑스 북부 누아용 경건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칼뱅은 14살이 되던 1523년에 고향을 떠나 파리로 왔으며, 마르세 대학에서 라틴어 문법을 공부하였다. 이후 몽테귀 대학에 진학하여 인문학의 대가인 에라스무스의 강의를 들으며 공부하였다. 

이후 칼뱅은 아버지의 권유에 의해 오를레앙과 부르쥬에서 법학을 공부하였는데, 이는 그를 종교개혁자로서의 길로 인도하신 하나님의 뜻이었다. 칼뱅은 이 시기에 가톨릭에서 개종하였고, 두 학교에서 루터의 영향을 받은 독일 유학생과 교수들을 사귀면서 종교개혁의 정신을 키우게 되었다. 

칼뱅은 다시 파리로 돌아왔는데, 이때 전혀 예상 밖의 사건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새로 부임한 파리대학 학장의 연설문을 작성한 것이 화근이 되어 파리에서 추방당하게 된 것이다. 칼뱅은 이 연설문에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와 루터의 글을 인용하여 당시 교회의 잘못된 관행을 비판한 것이다. 

칼뱅은 파리를 떠나 프랑스 남부로 피신하였다가, 프랑스에서는 종교개혁의 꿈이 어렵다는 것을 감지하고 스트라스부르크를 거쳐 스위스 바젤로 갔다. 칼뱅은 1536년 바젤에서 종교개혁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정리하여 책을 출판하였는데, 이것이 유명한 『기독교강요』이다. 이 책 한 권으로 그는 단번에 종교개혁자의 반열에 올라섰고, 유럽에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칼뱅은 『기독교강요』를 저술한 후 학문적 연구의 필요성을 느끼며 프랑스 남부 도시 스트라스부르크로 가려 하였는데, 도중에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자 파렐을 만나 그의 간곡한 권유로 제네바 생 피에르교회의 설교자로 남게 되었다. 칼뱅은 1536년 9월부터 강해설교를 시작하여 4,000회 가까이 설교를 하였다. 그는 설교뿐만 아니라 이곳에서 목사들을 모아 신학토론과 강의를 주도하면서 종교개혁의 필요성과 가톨릭의 잘못된 신앙을 비판하였다.

칼뱅은 개혁을 막는 반대파들과 시의회에서 부딪치고 시달렸으며, 추방되었다가 다시 돌아오기도 하였다. 하지만 기어코 제네바교회를 개혁하고 시 전체를 개혁의 도시로 만들었다. 칼뱅은 1564년 『기독교강요』 개정판을 마무리하고 병상에 누워, 1564년 5월 27일 54세의 나이로 소천하였다. 그가 남긴 최고의 유산은 모든 삶과 신앙생활에서 보여준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었다. 칼뱅의 종교개혁은 전 유럽과 미국을 거쳐 한국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문성모 목사

<전 서울장신대 총장•강남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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