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 김영훈 목사의 발자취를 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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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1)

아 하나님의 은혜로

김교철 목사님과 우리 부부는 11월 9일 중국 산동성 래양(萊陽)에 도착하였다. 그러면서 우리들은 깨달았다. 100년 전의 중국선교지를 선교사 박태로, 사병순, 김영훈 세 분 선교사의 사진을 들고 찾아가게 하신 것은 주님이 예비하신 여정이었다. 

래양에 도착하자 맞아주신 양조파(梁兆波) 부주임(副主任) 안내로 세 분 선교사님들의 사역지였던 옛 남관교회 지역을 둘러보았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옛터를 둘러보면서 세 분의 선교사 사진을 모시고 뜻하지 않게 옛 교회 터를 보게 된 것이다. 선교사들이 그리도 다시 돌아오고파 하시던 곳인데 그 기도를 하나님은 100년이 지난 후에 응답하셨다. 저의 큰 할아버지이신 김영훈 선교사님은 언제 어느 곳에서 돌아가신지 그 흔적을 찾을 수 없었는데….

그때 또 깨달았다. 아 여기 래양에 세 분 선교사가 함께 오시고 싶어 하셨구나! 하나님이 우리를 오도록 사진을 준비해 주셨구나! 영정사진처럼 들고라도 같이 오도록 계획하게 주신 것이구나!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게 하였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땅이 질척하지만 차에서 내려 둘러보았다. 래양 남관교회가 있던 그 자리는 곧 개발되어 옛 모습은 사라질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리 급하게 우리를 부르셨구나! 

칠성가(七星街)에 새로 옮겨 자리 잡은 래양교회에 도착하였다. 입구에 붉은 십자가 표지만 있는 건물 안으로 들어가니 꽤 넓은 공간이 다 교회로 사용되고 있었다. 천장도 높아 더 넓어 보이는 깨끗한 벽에는 아무 장식도 성화도 한 점 걸려 있지 않았다. 

주일 날 천여 명의 성도들이 모여 뜨겁게 예배 드리는 가운데 류연정 주임(主任)께 세 분 선교사의 활동 설명과 함께 사진을 전달할 때에 진지하게 관심을 보이는 중국 성도들의 모습에서 큰 감동을 받았다. 100년 전 일을 모르고 있었어도 이리 자유로이 래양인들은 천여 명이나 모여 예배를 드리고 있구나!

100년 전에 뿌린 씨앗은 좋은 열매를 맺고 있었다. 

래양은 깨어나고 있었고 복음으로 일어나고 있었다.

말씀을 전하러 오셨던 선조가 그토록 오고 싶었던 이곳을, 그 애타는 기도를 주님은 100년이 지난 오늘 아무 자격 없는 후손을 보내셨다. 

선교사를 보내는 나라 

‘우리가 중국에서 공맹의 윤리도덕을 받은 바 있는데 생명의 말씀으로 갚자’는 길선주 목사의 제의로 1912년 조선예수교장로회는 창립총회에서 중국에 선교사를 파송하기로 결의하였다. 1913년 한국 최초의 선교사 박태로, 사병순, 김영훈 세 목사는 가족과 함께 중국 산동성 래양현에 도착하였다. 

박태로(1870?-1918)는 평양장로회신학교 5회(1912년) 졸업생으로 1911년 황해노회 초대 피택장로였으며 황해노회에서 목사장립을 받았다. 

사병순(1878-1913)은 평양장로회신학교 6회 졸업생으로, 장로로 봉직하였었고 평북노회에서 목사장립을 받았다. 

김영훈(1877-1939)은 평양장로회신학교 6회 졸업생으로, 장로로 봉직하였었고 평북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이 3인의 중국개척 선교사는 “선교지원이 빈약한 상태에서 성과 력을 다하여 선교의 문로를 개척하여 영광과 찬송을 하나님께 드렸다.”

산동선교는 방효원과 홍승한(1917), 박상순(1918), 이대영(1922), 김순호(1931,여), 방지일(1937) 목사로 이어졌다. 이들 목사 중 김영훈, 이대영, 방지일 목사는 귀국 후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을 지내셨다. 

산동선교는 자립, 자양, 자전의 신앙생활을 강조한 조선교회 특유의 타문화권 선교였다. 식민지하에서 신생교회 나라가 외국의 “선교사를 보내는 나라”가 됨은 우리 민족이 하나님께 드린 뜨거운 감사의 표현이었다. 

지난 100년의 선교 경험은 향후 새롭게 시작될 통일한국의 선교방향을 제시하는 교훈이 될 것이다. 

김영훈(金永勳) 선교사의 활동

김영훈(1878-1939)의 부친 김유현(金有鉉)은 육군참령과 의주부사를 지낸 분이다. 일로 전쟁시 퇴각하는 노군부대로부터 국민을 보호하다 부상을 입었으며,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모든 관직을 사직하고 귀향하여 기독교인으로 여생을 보내며 아들들에게 기독교를 믿게 하였다. 

김영훈 선교사는 평안북도 월화면 호암교회 장로로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졸업(1913)한 뒤 평북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은 후 산동선교사로 사역하였다. 문장과 서예가 뛰어나 사역지에서 지방관에 보낸 한시는 70세 된 중국학자 장수명을 감동시켜 첫 세례를 받게 하였다. 또 미국선교사역을 위하여 미국 샌프란시스코 지역의 한인교회에서 활동하며 대한인 국민회 임원 및 새크라멘토 국어학교 교장 등 흥사단 단원으로 독립운동을 하였다. 

귀국 후 의주 서교회 목사와 의주 양실학교 교장으로 봉직했으며,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 회장(1927)을 역임하였다. 이때 산동선교 폐지론이 있었으나 말씀에 의지하여 산동선교를 지속시키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만일 산동선교를 폐지한다면 행 1장 8절에 말씀하신 주의 본의가 아닌 줄 나는 안다. 주의 말씀하신 본의는 동족으로부터 시작하여 땅 끝까지 전도하라 하심이요 동족을 유루(누락) 없이 다 믿게 한 후에 타족에게 전도하라는 것은 아니다.”

김영훈 목사는 그리스도인의 최고 덕목은 오직 주님에게만 충성하는 것임을 강조하였으나 “싸우자”라는 제목의 설교를 통하여 민족의 기개도 높이려 하였다. 

“아! 나아가 싸우자…. 대저 병법은 입장을 따라 변하나니 생지면 지키고, 사지면 싸우며, 국내면 지키고, 국외면 싸우며, 평안한 때면 지키고, 위태로운 시기면 싸운다.”

가장 낮은 자리로 물러나 주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았던 김영훈 목사의 설교와 뜨거운 숨결 같은 외침은 선교의 역사 속에 조용히 그러나 도도히 흐르고 있다. 

김교철 목사

<전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GMS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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