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이 전쟁(Trojan War)은 기원전 12세기경에 발생한 전쟁으로 기원전 8세기 중엽에 호메로스(Homeros)가 이 전쟁을 소재로 일리아드(Iliad)와 오딧세이(Odyssey)라는 서사시를 만들었다. 이것은 고대 그리스신화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지만, 19세기 독일의 사업가이며 고고학자인 하인리히 슐리만(Heinrich Schliemann)이 트로이를 발굴하여 연구한 결과 신화가 아니고 사실적임이 밝혀졌다. 트로이 전쟁의 발단은 트로이왕 프리아모스(Priamos)의 왕자 파리스(Paris)가 수행원을 대동하고 스파르타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파리스가 스파르타 메네라오스(Menelaos) 왕의 궁전에 체류하고 있는 동안에 메네라오스는 크레타(Crete)의 외조부 카트레우스(Catreus)의 장례식에 참석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가 거주하던 스파르타의 궁전을 잠시 비우게 되었다. 그런 동안에 스파르타 궁전에는 메네라오스의 왕비 헬레네(Helene)와 트로이에서 온 파리스가 남아 있게 되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파리스가 그의 수행원을 통해 메네라오스의 왕비 헬레네를 트로이로 납치하게 되었다. 헬레네에게는 아홉 살 된 딸 헤르미오네(Hermione)가 있었는데, 그의 딸을 두고 그녀가 떠날 때의 심정은 아마도 처절했을 것이다.
메네라오스는 외조부의 장례식에 참석했다가 귀국하자 그의 왕비 헤레네가 트로이로 납치된 것을 알게 되었다. 분노한 메네라오스는 미케네(Mycenae)의 왕이며, 그의 형인 아가멤논(Agamemnon)에게 원군을 요청하였다. 그래서 스파르타의 메네라오스는 아가멤논을 위시하여 아킬레우스(Achilleus), 오디세우스(Odysseus), 아이아스(Aias) 등 그리스의 영웅들의 협조를 받아 그리스군이 동방의 트로이성을 공격하였다. 트로이성은 견고했고, 수비대는 강했다. 이 전쟁은 10년간 지속되었고, 결판이 나지 않았다. 이럴 때에 이타카(Ithaca)의 영주이며 트로이 전쟁 영웅인 오디세우스가 그리스 연합군에게 목마(木馬)를 만들 것을 제안하였다.
그의 제안이 받아들여져 바퀴가 달린 대형 목마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오디세우스는 그 목마 안에 여러 명의 그리스 병사들을 숨겨둔 채 그 목마를 트로이성 가까운 곳에 세워 놓고 그리스 연합군을 거짓 철수시켰다. 그후 트로이군 정찰대는 해안가 진지 한복판에 거대한 목마 하나가 덩그러니 남은 것을 발견하였다. 이를 보고하려 돌아가니, 이미 성 안에는 그리스 연합군이 남기고 간 목마를 트로이성 안으로 끌어들이면 트로이가 완벽한 승리를 거둘 것이라는 예언이 널리 퍼져 있었다. 사실 이것은 오디세우스의 4촌이었던 시논(Chinon)을 포함한 소규모 선행 침투병력이 트로이성 안에 미리 퍼트린 거짓 예언이었다. 그리스군 예언의 성취를 방해하기 위해 성문을 넘지 못하도록 거대한 목마를 만들었다는 그럴싸한 소문까지 떠돌았다.
트로이 예언자들은 이런 소문이 거짓 예언이라는 것을 곧 알아차렸다. 그중에서 예언자 라오콘(Laocoon)은 소문을 강하게 질타하고 목마 유입을 반대했다. 그러던 중 갑자기 이상한 일이 발생했다. 갑자기 바다에서 나타난 뱀에게 라오콘이 목이 졸려 죽었다. 트로이인들은 이를 신에게 바친 선물을 훼손한 징벌이라고 여겨 의심의 분위기가 줄어들었다. 프리아모스 왕의 딸 카산드라(Kassandra)는 목마를 트로이성으로 끌어들이면 트로이가 망한다고 강하게 반대했다. 목마 유입을 놓고 많은 논쟁이 있었지만, 결국 트로이 목마가 트로이 성내로 들어왔다. 그날 밤 목마 안에 은신했던 그리스인들이 트로이 목마 내의 빗장을 풀고 나왔고, 이들은 미리 트로이 성내에 진입해 있던 시논(Chinon) 일행과 합류하였다. 이들이 트로이 성문을 열어젖히고 철수했던 그리스군에게 횃불의 신호를 보내 그리스군이 입성함에 따라 견고했던 트로이성은 마침내 함락되었다. 나라에 위기가 왔을 때, 지도자들의 판단력이 얼마나 중요하고 내부의 적이 외부의 적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경각심을 우리는 망각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조인형 장로
– 영세교회 원로
– 강원대 명예교수
– 4.18 민주의거기념사업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