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을 승리로 이끄는데 가장 공이 큰 사람은 트루먼 대통령이다. 그는 대한민국을 위해 대통령이 된 사람 같았다. 그는 선거를 치르지 않고도 대통령이 되는 행운을 가졌다. 즉 루즈벨트 대통령이 4선으로 당선될 때 함께 부통령이 됐다. 그러나 대통령이 취임 82일 만에 갑자기 서거하자 1945년 4월 대통령을 승계 받아 제33대 대통령이 됐다. 그는 8월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탄을 투하해 2차 대전을 종식시켰으며, 유럽의 공산화를 막기 위해 ‘트루먼독트린’(1947.3)을 발표하고 소련에 대항하는 반공정책을 표방했다.
3년 뒤 1950년 6월 25일 소련의 사주를 받은 김일성이 남침하자 오직 한국을 구해야겠다는 일념으로 첫날부터 분주하게 동분서주한 사람이다.
6.25남침소식은 한국보다 미국이 먼저 알았다. 즉 6월 25일 새벽 4시, 옹진반도에 포탄이 수없이 떨어지자 그곳(국군 17연대)에 파견되어 있던 미 고문관이 전쟁이 터진 줄 알고 즉시 서울 주재 미대사관에 전문을 날리고, 대사관측에서는 워싱턴에 보고하는 과정에서 UP통신의 기자가 이를 알고 재빠르게 전문으로 센프란시스코를 거쳐 뉴욕 본사에 급전했다.
뉴욕 본사에서는 톱뉴스가 접수되자 즉시 전 세계에 ‘한국전쟁 발발’기사를 내보냈는데, 워싱턴에서 이 소식을 접한 시간은 토요일 오후 8시 40분경이었다(한국시간 일요일 오전 9시 40분) 한국에서는 아직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고하기 20분 전이었다.
미 국무성은 즉시 트루먼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한편 토요일 밤임에도 불구하고 즉시 관련자들을 소집해 대책회의에 들어갔다. 대통령은 고향인 미주리주 인디펜던스의 농장에서 주말휴식을 취하다가 전쟁소식을 보고받고 즉시 일요일 아침 내각회의를 소집하는 한편, 유엔 안보리소집을 요구하도록 지시하고 급히 비행기로 워싱턴으로 돌아왔다. 전광석화처럼 급하게 움직인 사례는 전무후무하다. 트루먼의 이 같은 빠른 조치로 인해 한국은 희망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워싱턴으로 오는 비행기 안에서 과거 히틀러의 침략정책에 대해 영국과 프랑스가 강하게 대응하지 못했기 때문에 2차대전이 발발하게 됐다고 생각하고, 북한의 남침을 처음부터 봉쇄하지 못하면 소련이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다는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따라서 처음부터 단호하게 대처하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이렇듯 트루먼의 마음을 움직이게 한 것은 하나님이시다. 트루먼은 백악관에 도착하자마자 미리 대기하고 있던 ‘안보회의’에서 북한을 강하게 규탄하고 즉시 미공군의 참전을 명령했다. 그리고 오후 3시에 소집된 안보리에서 유엔의 참전결의를 얻어냈다. 이때 소련대표 말리크가 불참함으로써 거부권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하신 것도 하나님의 은총이다.
7월 7일 유엔결의로 유엔군사령부가 창설되고 8일 맥아더를 유엔군사령관에 임명했으며 이미 7월 1일 지상군 2개 사단을 파병시켰다. 트루먼이 맥아더를 유엔군사령관에 임명한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72년 전, 이름도 없는 신생 독립국 작은 나라를 위해 미국을 비롯한 세계가 재빠르게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은총이다. 그러나 앞에서 뛴 사람은 바로 트루먼이었다. 또한 압록강까지 북진하고 있을 때 중공군의 개입으로 유엔군이 철수할 수밖에 없는 위기를 당했지만 이 난국을 수습하기 위해 트루먼은 원자탄을 사용하겠다고 기자회견을 할 정도로 한국전쟁의 승부를 건 사람이기도 하다. 물론 원자탄 사용은 없었다. 그러나 맥아더가 원자탄사용을 건의했을 때 반대했던 트루먼이 왜 기자회견까지 했는가? 이점을 우리는 높이 평가해야 한다. 이에 대한 해답은 그의 자서전에서 얻을 수 있다. 일본에 원자탄을 투하해 전쟁을 종식시킨 것은 기쁘지만 많은 사람을 죽게 한 것을 평생 후회하며 살았다고 한다. 따라서 6.25때는 원자탄을 사용하지 않았다. 한편 그는 맥아더를 해임시킨 사건으로 인기가 떨어지자 차기 대선출마를 포기하고 시민으로 돌아갔다. 대통령 임기 중 후반 2년은 오로지 한국을 위한 정치를 한 멋진 대통령! 한국을 위해 전력을 다한 트루먼 대통령에게 우리는 박수를 보내며 그에 대한 고마움을 절대 잊지 말자.
배영복 장로<연동교회>
• 베트남 선교협회 회장